본관은 원율(原栗). 이연년(李延年)의 부모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가계를 전혀 알 수 없으나, 자기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다.
1237년(고종 24) 원율(原栗)의 이연년 형제는 산림(山林)의 무리를 끌어모아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를 자칭하고 해양(海陽) 등지의 주 · 군(州郡)을 점령하여 위세를 떨쳤다. 이연년 형제가 중심이 된 민의 저항은 몽골의 3차 침입(1235∼1239, 고종 22∼26)으로 고려가 막대한 피해를 보았던 시기에 일어났던 점에서 강화천도(江華遷都) 이후 내륙 지역의 피해와 질고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원율은 나주목(羅州牧)의 속현(屬縣)이었고, 담양 또한 나주목의 속현으로서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났던 시기는 1236년(고종 23) 이후 최씨 정권의 최대 숙원 사업이었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조판하던 시기였다. 이 조판 사업에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었는데, 최씨 정권 경제력의 바탕을 이루었던 전국 각지의 농장이 그 기저가 되었다. 최씨 정권의 농장 분포는 임피(臨陂) · 진도(珍島) · 강진(康津) · 보성(寶城) · 화순(和順) · 승주(昇州) · 남해(南海) · 하동(河東) · 진주(晋州) · 단성(丹城) 등 전라 · 경상도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원율⋅담양에도 최씨 정권의 농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182년(명종 12) 전주(全州)의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의 저항 배경이 관선(官船) 제조의 폐단에서 비롯되었듯이, 이연년 등의 저항도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과 강도(江都) 정부의 대민 수탈의 폐단에서 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원율 · 담양 등 여러 고을의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 모아”, “적이 김경손(金慶孫)이 나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주성(州城)을 포위하는 데 적이 수풀처럼 빽빽이 모였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여기에 참여한 계층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연년이 스스로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고 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의 오기(誤記)로 이해한다. 이연년 형제를 필두로 한 대정부 저항은 앞서 최충헌 정권 초기 경주의 ‘신라 부흥 운동(新羅復興運動)’, 1217년(고종 4) 최광수(崔光秀)의 ‘고구려 부흥 운동(高句麗復興運動)’과 더불어 무신 정권의 가혹한 불법 행위에 맞서 새로운 질서 구축을 기치로 삼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237년 나주성에 진주한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김경손(金慶孫)을 포위하여 싸우다가 이연년이 살해됨으로써 저항이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