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동굴로서,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국립공원 경역(境域) 안에 속하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羅濟通門(나제통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서 행정구역으로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각기 풍속과 전통이 판이하게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와 관계된 유적이나 전설이 많다. 부근의 야산에 산재한 약 3백여 기의 고분은 신라와 백제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파리소(沼)라는 연못은 양국의 격전시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통문은 삼국통일전쟁시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왕래했다고 하여 ‘통일문(統一門)’이라고도 불린다. 인근의 무산성지(茂山城址) 근방 사선암(四仙巖)이라는 크고 평평한 바위는 김유신 등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며 놀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이 지역이 신라 · 백제 양국의 전쟁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신라 · 백제 양국은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조령 · 죽령 방면과 추풍령 방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가야 제국(加耶諸國)이 신라에 흡수되어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맞대게 되면서부터 양국은 육십령(六十嶺)을 넘나들며 전투를 벌였다.
통문은 육십령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신라군과 백제군이 자주 내왕했을 것이고, 『삼국사기』에 김유신이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과 무산성(茂山城)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통문은 삼국시대가 아닌 후대에 통문의 역사적 의미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도 하는데, 무주군청지인 『적성지(赤城志)』에 의하면 이 유적의 본래 이름은 '기미니굴'이며, 1925년 무주의 금광개발과 농임삼물의 신속한 운반을 위해 만든 인공터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