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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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의회 일본군 위안부 사죄(HR121) 결의안은 2007년 7월 30일 미국 하원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이다. 1930년대 일본의 전장 확대로 인해 식민지 조선과 대만 여성 등이 군위안소로 보내졌다. 1990년대 초 한국 여성운동이 성장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것을 기점으로 유엔은 일본에 진상규명, 사죄와 배상, 책임자 처벌 등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사실 자체의 부정과 법적 책임의 회피 입장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결의안 통과 이후, 유엔 등 국제사회의 도덕적 지탄에 일본 정부는 다소 흔들림을 보였다.
미국 연방의회 일본군 위안부 사죄(HR121) 결의안 (美國 聯邦議會 日本軍 慰安婦 謝罪(HR121) 決議案)
미국 연방의회 일본군 위안부 사죄(HR121) 결의안은 2007년 7월 30일 미국 하원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이다. 1930년대 일본의 전장 확대로 인해 식민지 조선과 대만 여성 등이 군위안소로 보내졌다. 1990년대 초 한국 여성운동이 성장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것을 기점으로 유엔은 일본에 진상규명, 사죄와 배상, 책임자 처벌 등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사실 자체의 부정과 법적 책임의 회피 입장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결의안 통과 이후, 유엔 등 국제사회의 도덕적 지탄에 일본 정부는 다소 흔들림을 보였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韓日 日本軍 ‘慰安婦’ 合意)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정부의 정치적 합의이다. 2014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국장급 및 고위급 협의를 병행해 온 한일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공동기자회견 방식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였다. 정부 주도의 합의 과정은 비민주적이었으며, 피해자 중심 접근도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은 해산되었으며, 일본 정부의 출연금 잔액은 처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韓日 日本軍 ‘慰安婦’ 合意)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韓日 日本軍 ‘慰安婦’ 合意)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과 일본 정부의 정치적 합의이다. 2014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국장급 및 고위급 협의를 병행해 온 한일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공동기자회견 방식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였다. 정부 주도의 합의 과정은 비민주적이었으며, 피해자 중심 접근도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은 해산되었으며, 일본 정부의 출연금 잔액은 처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는 대한민국과 타이완, 중국, 필리핀 등 위안부 피해를 입은 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및 활동가, 시민들이 국경을 넘어 ‘위안부‘ 문제 해결 모색을 위해 조직한 국제연대회의이다. 1992년 8월부터 개최되기 시작하여 1~2년마다 회의를 열어 위안부 문제 현안에 대응하고 있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에 대한 전시 성 노예 문제 제기,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처벌을 위한 2000년 여성국제법정 개최 등 국제 인권운동과 여성운동 진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日本軍 ‘慰安婦’ 問題解決을 위한 亞細亞連帶會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는 대한민국과 타이완, 중국, 필리핀 등 위안부 피해를 입은 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및 활동가, 시민들이 국경을 넘어 ‘위안부‘ 문제 해결 모색을 위해 조직한 국제연대회의이다. 1992년 8월부터 개최되기 시작하여 1~2년마다 회의를 열어 위안부 문제 현안에 대응하고 있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에 대한 전시 성 노예 문제 제기,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처벌을 위한 2000년 여성국제법정 개최 등 국제 인권운동과 여성운동 진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인 강제연행은 193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본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 공급을 위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인력수탈정책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노동력통제, 자금통제, 사업통제, 문화통제에 관한 법령에 근거하여 인력을 동원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사역당했고, 동원 현장에서 폭격이나 사고, 질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피해보상은 물론 당시 일본 정부가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다.
조선인 강제연행 (朝鮮人 强制連行)
조선인 강제연행은 193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본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 공급을 위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인력수탈정책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노동력통제, 자금통제, 사업통제, 문화통제에 관한 법령에 근거하여 인력을 동원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사역당했고, 동원 현장에서 폭격이나 사고, 질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피해보상은 물론 당시 일본 정부가 약속한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다.
1963년 한인 여성들의 미국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창립된 비영리단체.
한미여성재단 (韓美女性財團)
1963년 한인 여성들의 미국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창립된 비영리단체.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는 2018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통합 출범시킨 단체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더불어 전시성폭력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회복, 역사교육 및 추모사업 등을 전개하여 미래세대의 올바른 기억 정립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요시위·평화비 건립 지원·생존자 복지 지원·연구조사 교육·국내외 연대·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日本軍性奴隸制 問題解決을 爲한 正義記憶連帶)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는 2018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통합 출범시킨 단체이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와 더불어 전시성폭력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회복, 역사교육 및 추모사업 등을 전개하여 미래세대의 올바른 기억 정립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요시위·평화비 건립 지원·생존자 복지 지원·연구조사 교육·국내외 연대·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김학순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한국인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인물이다. 김학순은 1990년 일본이 군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한 것에 분노해 공개 증언에 나섰고, 그의 증언에 많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증언할 용기를 얻었다. 또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여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김학순 (金學順)
김학순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한국인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인물이다. 김학순은 1990년 일본이 군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한 것에 분노해 공개 증언에 나섰고, 그의 증언에 많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증언할 용기를 얻었다. 또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여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진화 계림회는 1944년 중국 저장성 진화에서 전쟁 동원을 위해 조직된 조선인 친일단체이다. 이 단체의 문서로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된 명부가 발견되었다. 2015년 10월, 진화 계림회 회칙 및 명부가 중국에서 공개되었는데, 명부에는 12개소의 진화 지역 위안소 또는 접객점의 업자와 그들과 현지 주소가 같은 20대 전후의 여성 129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진화 계림회 (金華 鷄林會)
진화 계림회는 1944년 중국 저장성 진화에서 전쟁 동원을 위해 조직된 조선인 친일단체이다. 이 단체의 문서로 일본군 ‘위안부’가 포함된 명부가 발견되었다. 2015년 10월, 진화 계림회 회칙 및 명부가 중국에서 공개되었는데, 명부에는 12개소의 진화 지역 위안소 또는 접객점의 업자와 그들과 현지 주소가 같은 20대 전후의 여성 129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000회를 맞은 수요시위를 기념하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건립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이다. 이후 건립된 ‘위안부' 기림비를 통칭하여 ‘소녀상’으로 부른다. 일본 정부의 소녀상 건립 반대 및 철거 주장에 대응하여 국내외에 소녀상 건립이 확산되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 (平和의 少女像)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000회를 맞은 수요시위를 기념하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건립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이다. 이후 건립된 ‘위안부' 기림비를 통칭하여 ‘소녀상’으로 부른다. 일본 정부의 소녀상 건립 반대 및 철거 주장에 대응하여 국내외에 소녀상 건립이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