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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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북만주 지역에서 김일성 등을 중심으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과 함께 입북한 후 정권을 장악한 정치 집단.
빨치산파
1930년대 북만주 지역에서 김일성 등을 중심으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소련군과 함께 입북한 후 정권을 장악한 정치 집단.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주축으로 창건했다는 항일 무장군사조직이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이 창건한 첫 ‘주체적 혁명무력’으로서 ‘항일유격대’였다며, 창건 당시에는 ‘반일인민유격대’로 호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며 항일투쟁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반일인민유격대 창설 날짜인 4월 25일을 ‘인민군 창건 기념일’, 즉 ‘건군절’로 정하고 창건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는 ‘김일성 혁명전통’에 입각한 것으로 김일성 우상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 (朝鮮人民革命軍)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주축으로 창건했다는 항일 무장군사조직이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이 창건한 첫 ‘주체적 혁명무력’으로서 ‘항일유격대’였다며, 창건 당시에는 ‘반일인민유격대’로 호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며 항일투쟁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반일인민유격대 창설 날짜인 4월 25일을 ‘인민군 창건 기념일’, 즉 ‘건군절’로 정하고 창건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는 ‘김일성 혁명전통’에 입각한 것으로 김일성 우상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격대는 1948년 이후 남한 각지에서 기습·교란· 파괴의 유격 활동을 했던 무장부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하는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로 불리기도 했다. 시작은 야산대로 불리는 무장유격대이며, 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여순사건 때 산으로 숨어들었던 일부 군인에 흡수되면서부터이다. 1949년 북한에서는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해 이들을 지휘하고 지원했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소멸단계에 이르렀다가, 한국전쟁 이후 낙오한 북한군과 합세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1950년대 중반까지 산발적으로 유격활동을 이어갔다.
유격대 (遊擊隊)
유격대는 1948년 이후 남한 각지에서 기습·교란· 파괴의 유격 활동을 했던 무장부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하는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로 불리기도 했다. 시작은 야산대로 불리는 무장유격대이며, 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여순사건 때 산으로 숨어들었던 일부 군인에 흡수되면서부터이다. 1949년 북한에서는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해 이들을 지휘하고 지원했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소멸단계에 이르렀다가, 한국전쟁 이후 낙오한 북한군과 합세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1950년대 중반까지 산발적으로 유격활동을 이어갔다.
남부군은 6.25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현상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이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1월 강원도 후평리에서 이현상은 이승엽과 함께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창설하였다. 12월 충북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전투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한국군과 유엔군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에 한국군은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하여 남부군을 토벌하였다.
남부군 (南部軍)
남부군은 6.25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현상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이다.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1월 강원도 후평리에서 이현상은 이승엽과 함께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창설하였다. 12월 충북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전투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한국군과 유엔군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에 한국군은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하여 남부군을 토벌하였다.
이홍광은 일제강점기 때, 반석중심현위원회 위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1925년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1927년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반일회와 농민회 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1년 속칭 ‘개잡이대’라고 알려진 적위대를 창건해 항일무장투쟁 및 반봉건투쟁에 앞장섰다. 1932년 남만유격대의 침모장을 맡아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인으로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며 동흥 점령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홍광 (李紅光)
이홍광은 일제강점기 때, 반석중심현위원회 위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1925년 중국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1927년 재만농민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반일회와 농민회 등 단체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931년 속칭 ‘개잡이대’라고 알려진 적위대를 창건해 항일무장투쟁 및 반봉건투쟁에 앞장섰다. 1932년 남만유격대의 침모장을 맡아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인으로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며 동흥 점령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강점기 때, 주하반일유격대 당지부 서기,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합동유격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복림 (李福林)
일제강점기 때, 주하반일유격대 당지부 서기,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합동유격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 계열의 활동을 지원할 정치공작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1일 강동군에 설립한 북한 군사교육기관이다. 입교 학생은 모두 남한에서 월북한 자들로 창설 당시에는 대남공작요원 양성이 목적이었다.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유격대요원 양성도 겸하게 되었다. 3개월의 군사 단기반과 6개월의 정치반이 있었고, 10차에 걸쳐 총원 2,385명을 양성하여 남파하였다. 한국군은 인민유격대 소탕 작전을 전개해야했기에 계획된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군 전력을 약화시킨다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동정치학원 (江東政治學院)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 계열의 활동을 지원할 정치공작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1일 강동군에 설립한 북한 군사교육기관이다. 입교 학생은 모두 남한에서 월북한 자들로 창설 당시에는 대남공작요원 양성이 목적이었다.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유격대요원 양성도 겸하게 되었다. 3개월의 군사 단기반과 6개월의 정치반이 있었고, 10차에 걸쳐 총원 2,385명을 양성하여 남파하였다. 한국군은 인민유격대 소탕 작전을 전개해야했기에 계획된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군 전력을 약화시킨다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서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동북항일연군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동광 (李東光)
일제강점기 남만임시특별위원회 서기, 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동북항일연군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황포군관학교 교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양림 (楊林)
일제강점기 때, 황포군관학교 교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마건은 일제강점기에 적기단 결성 및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한북로독군부 소속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의용군 소대장으로서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였으며, 적기단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건 (馬建)
마건은 일제강점기에 적기단 결성 및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한북로독군부 소속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의용군 소대장으로서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하였으며, 적기단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 위원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지도자.
김만흥 (金萬興)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 위원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한 지도자.
이덕구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3·10총파업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교사를 그만둔 뒤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라산으로 입산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봉기에 참여하였고, 조천, 제주, 구좌면 출신들로 구성된 3·1지대 지대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사살되었다.
이덕구 (李德九)
이덕구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3·10총파업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교사를 그만둔 뒤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라산으로 입산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봉기에 참여하였고, 조천, 제주, 구좌면 출신들로 구성된 3·1지대 지대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