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대 ()

현대사
단체
1948년 이후 남한 각지에서 유격투쟁을 벌인 무장부대.
이칭
이칭
조선인민유격대, 빨치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유격대는 1948년 이후 남한 각지에서 기습·교란· 파괴의 유격 활동을 했던 무장부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하는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로 불리기도 했다. 시작은 야산대로 불리는 무장유격대이며, 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여순사건 때 산으로 숨어들었던 일부 군인에 흡수되면서부터이다. 1949년 북한에서는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해 이들을 지휘하고 지원했다.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소멸단계에 이르렀다가, 한국전쟁 이후 낙오한 북한군과 합세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1950년대 중반까지 산발적으로 유격활동을 이어갔다.

정의
1948년 이후 남한 각지에서 유격투쟁을 벌인 무장부대.
개설

유격대는 1948년 이후 남한 각지에서 유격투쟁을 벌인 무장부대를 말한다. 흔히 빨치산(Partizan)이라고도 하는 이 무장조직은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남한 각 지역에 조직되어 있던 야산대에 여수 · 순천사건 때 진압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던 군인들이 합류함으로써 무장유격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유격대는 1949년 5월까지 주로 유격전구 창설에 주력했는데, 호남 · 지리산 · 태백산 · 영남 · 제주도 등 남한 133개 군 중 118개 군에 유격전구를 창설했다.

7월 이후 유격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유격전을 보다 조직화 · 대규모화하기 위해 각지의 유격대를 통합,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했다. 이 유격대는 한국전쟁 직전 거의 소멸 단계에 이르렀다가, 1950년 가을 북한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이 또 다시 산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들이 정전 이후 마지막까지 남은 인민유격대였다.

연원 및 변천

미군정기인 1946년 대구 10·1사건으로 유혈 사태가 일어나면서 남조선노동당이 탄압을 받게 되었고, 이들의 활동은 불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익세력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948년 2·7구국투쟁제주 4·3사건 이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야산대로 불리던 무장유격대가 되었다. 야산대 중 일부는 여수 · 순천사건 이후 군 부대 조직으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1949년 6월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민전)이 발족했다. 민전은 출범하면서 무장 유격투쟁을 선언하고 통일 사업을 벌여나갈 것을 선언했다.

민전의 결성은 “남조선 애국인민들의 국토 완정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계기”로 평가되었다. 민전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이승만 정부에 반대해 투쟁에 나선 유격대와의 연계였다. 이로 인해 유격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 북한의 지원이라는 외부 요인에 따라 조직체계가 정비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일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기구로 조선인민유격대를 1949년 7월에 창설했고, 조직의 지휘는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이승엽이 담당했다.

현황

1949년 창설된 조선인민유격대는 오대산 지구를 맡은 제1병단과 지리산 지구의 제2병단, 태백산 지구의 제3병단으로 편성되었다. 제1병단은 이호제, 제2병단은 이현상, 제3병단은 김달삼과 남도부가 각각 책임자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동정치학원을 통해 양성한 유격대원을 포함해 약 2,400명의 빨치산을 1948년부터 약 1년 동안 10회에 걸쳐 남파했다. 이들 가운데 약 1,700명이 한국전쟁 발발 시점까지 남아있었다. 하지만 1950년 초부터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국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성공해 조선인민유격대는 1949년 ‘9월 공세’를 정점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차츰 무력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유격대는 1950년 4월 한 달 동안 참가인원 6만 5천여 명, 교전회수 2,948회에 달하는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1946년부터 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인 야산대는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해왔다. 인민유격대는 이승만 정부 수립 전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군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남한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큰 타격을 입고 지리멸렬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낙오한 인민군의 가세로 또 다른 유격대 활동이 벌어졌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남한지역의 유격대는 남부군단으로 재편성되어 최후까지 투쟁했다. 하지만 전선의 영향을 주는 뚜렷한 성과를 얻지는 못한 채 1950년대 중반까지 산발적으로 유격활동을 이어갔다.

참고문헌

『빨치산자료집』(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실록 정순덕』(정충제, 대제학, 1989)
『대비정규전사』(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부, 1988)
『남부군』(이태, 두레, 1988)
『여자 빨치산』(김산, 창작예술사, 1988)
『빨치산』(이영식, 행림출판, 1988)
『공비연혁』(대한민국 육군본부, 육군본부, 1971)
『공비토벌사』(대한민국 육군본부, 육군본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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