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건(馬建, 1894~1933)은 함경북도 길주군 출신으로, 본명은 마천룡(馬天龍), 이명(異名)은 마인룡(馬仁龍) · 마천용(馬天容)이다.
1899년 만주로 이주한 후 1914년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철혈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에는 대한국민회군에 입대하였다. 1920년 4월에는 대한국민회의 군무원으로 러시아에 파견되어 무기를 구입하는 일을 하였다. 같은 해 5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대한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부대원이 되어 6월에는 봉오동 전투에, 10월에는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범도를 따라 밀산을 거쳐 1921년 6월 흑룡강을 건너 러시아 이만으로 갔다가 자유시 알렉세예프스크(지금의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사변을 겪었다. 같은 해 10월 옌하이저우〔沿海州〕 이만으로 이동하여 대한의용군사회에 가담하여 재무부 소속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1월과 12월에는 대한의용군 제2중대 제1소대장으로서 러시아 백군에 맞서 이만 전투, 볼로차에프스크 전투에 참전하였다.
시베리아 내전이 끝난 뒤 1923년 1월 아버지인 마진과 함께 적기단 결성에 참여해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옌지현〔延吉縣〕 옹성랍자에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자 입당하여 옹성랍자 야체이카(세포조직)를 건립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내 화요파의 독주에 반발하다가 만주총국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당적을 회복하고 옹성랍자 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9년 2월 둔화〔敦化〕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 건립에 참가하여 검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4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동만주특별위원회 조선국내공작위원회의 성원으로서 국내의 적색노동조합 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10월 중국공산당 연화혁명위원회 군사위원이 되어 적색자위대 건립에 노력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항일유격대 조직 사업을 펼쳤고, 옌지현 왕우구, 왕칭현〔汪淸縣〕 소왕청 유격 근거지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8월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로부터 민족주의자, 파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러시아로 이동하다가 국경지대에 매설된 지뢰를 밟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