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재일_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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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화(崔昌華)는 해방 이후, 일본의 대한기독교 오쿠라 교회에서 목회한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월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목사가 되었으며 재일 한인들의 인권을 위해 법적 투쟁에 앞장서 참정권 획득 운동, 민족어 발음 사용 개정 운동, 지문날인 거부운동, 유엔을 통한 인권 활동을 전개하였다.
최창화 (崔昌華)
최창화(崔昌華)는 해방 이후, 일본의 대한기독교 오쿠라 교회에서 목회한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월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목사가 되었으며 재일 한인들의 인권을 위해 법적 투쟁에 앞장서 참정권 획득 운동, 민족어 발음 사용 개정 운동, 지문날인 거부운동, 유엔을 통한 인권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에 평화를」, 「창고」, 「맨홀」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조양규 (曺良奎)
해방 이후 「조선에 평화를」, 「창고」, 「맨홀」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재일 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풍의 성명. 통명·통칭이름.
통칭명 (通稱名)
재일 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풍의 성명. 통명·통칭이름.
재일한인 주관으로 1983년부터 2002년까지 오사카 이쿠노지역에서 개최된 재일한인의 민족축제. 재일한인민족문화제.
이쿠노 민족문화제 ([生野] 民族文化祭)
재일한인 주관으로 1983년부터 2002년까지 오사카 이쿠노지역에서 개최된 재일한인의 민족축제. 재일한인민족문화제.
재일 한인의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한국풍의 성명. 본명.
민족명 (民族名)
재일 한인의 호적에 기재되어 있는 한국풍의 성명. 본명.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은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의 고반초, 로쿠반초를 중심으로 한국식 음식점과 식자재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1920~1930년대 7천7백여 명의 한인들이 나카타구의 고무공장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 귀환하지 않고 잔류한 한인들은 고베의 합성피혁 신발 산업에 주요 노동력으로 참여했다. 나가타구의 합성피혁 산업은 1970년대에는 번성했으나, 1980년대 후반 엔고와 1990년대 중국산 저가 제품의 수입으로 쇠퇴했다. 2010년 기준 나가타구 거주자 중 약 4.6%가 한국·조선인이며, 이는 효고현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 (Kôbe[神戶] Nagata[長田]區 韓人村)
고베 나가타구 한인촌은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의 고반초, 로쿠반초를 중심으로 한국식 음식점과 식자재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1920~1930년대 7천7백여 명의 한인들이 나카타구의 고무공장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 귀환하지 않고 잔류한 한인들은 고베의 합성피혁 신발 산업에 주요 노동력으로 참여했다. 나가타구의 합성피혁 산업은 1970년대에는 번성했으나, 1980년대 후반 엔고와 1990년대 중국산 저가 제품의 수입으로 쇠퇴했다. 2010년 기준 나가타구 거주자 중 약 4.6%가 한국·조선인이며, 이는 효고현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1962년 3월 일본 동경에서 김인재가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 종합교양지.
한양 (漢陽)
1962년 3월 일본 동경에서 김인재가 중심이 되어 창간한 잡지. 종합교양지.
재일동포북송반대전국대회는 1959년 2월 21일과 6월 18일 재일한인북송반대전국위원회 주최로 개최된 재일교포 북송반대 집회이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 이래 재일교포 북한 송환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재일교포의 북송 실시를 각의 양해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이를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적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1959년 2월 16일 국민총궐기대회와 6월18일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재일교포북송반대 국민운동은 실질적으로 북송을 저지하지는 못 했다.
재일동포북송반대전국대회 (在日同胞北送反對全國大會)
재일동포북송반대전국대회는 1959년 2월 21일과 6월 18일 재일한인북송반대전국위원회 주최로 개최된 재일교포 북송반대 집회이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결성 이래 재일교포 북한 송환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59년 2월 13일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재일교포의 북송 실시를 각의 양해했다. 이에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이를 저지하기 위한 범국민적 반대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1959년 2월 16일 국민총궐기대회와 6월18일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재일교포북송반대 국민운동은 실질적으로 북송을 저지하지는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