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청년총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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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용은 일제강점기 청년운동 및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고 령출신. 게이오(慶應)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사상단체인 신인회, 효민회, 코스모구락부, 십월회, 북성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전진(前進)』의 편집 발행인이었다. 1927년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고. 1947년 잡지 [재건]의 주간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 시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25교수 데모를 주도했다.
변희용 (卞熙瑢)
변희용은 일제강점기 청년운동 및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고 령출신. 게이오(慶應)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사상단체인 신인회, 효민회, 코스모구락부, 십월회, 북성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전진(前進)』의 편집 발행인이었다. 1927년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했고. 1947년 잡지 [재건]의 주간이 되었다. 1960년 4월혁명 시 재경교수단 구국선언과 4․25교수 데모를 주도했다.
김태수는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후 영동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사상운동 단체 칠월회 회원이었으며, 적우동맹 책임비서를 지냈다. 영동 지역 대표적인 활동가로,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 조직부장과 영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태수 (金台洙)
김태수는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후 영동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사상운동 단체 칠월회 회원이었으며, 적우동맹 책임비서를 지냈다. 영동 지역 대표적인 활동가로, 민주주의민족전선 충북지부 조직부장과 영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남윤구 (南潤九)
일제강점기 때,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장채극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 사회주의자동맹 발기인 등을 역임한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3·1운동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국민대회사건을 일으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여 서울청년회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으며, 신간회 청진지회 집행위원을 맡았다.
장채극 (張彩極)
장채극은 일제강점기 고려공산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 사회주의자동맹 발기인 등을 역임한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운동가이다. 3·1운동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국민대회사건을 일으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여 서울청년회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으며, 신간회 청진지회 집행위원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항일군정대학 교관, 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부수상 등을 역임하다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관료·독립운동가.
최창익 (崔昌益)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항일군정대학 교관, 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부수상 등을 역임하다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관료·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독립운동가.
정노식 (鄭魯湜)
일제강점기 때,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독립운동가.
박호진은 일제강점기 천도교여성동맹 중앙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여성운동가이다. 1906년 12월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주의자이자 천도교인인 이황과 결혼하였다. 중국 광동국립대학 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천도교여성동맹, 근우회, 조선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1932년 3월 25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박호진 (朴昊辰)
박호진은 일제강점기 천도교여성동맹 중앙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여성운동가이다. 1906년 12월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주의자이자 천도교인인 이황과 결혼하였다. 중국 광동국립대학 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천도교여성동맹, 근우회, 조선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1932년 3월 25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