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12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숙용(朴淑容)이다.
평양 숭의여학교와 이화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의주에서 잠시 교원 생활을 하다가 1922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으며, 남화학원을 수료하였다. 사회주의자이자 천도교인인 이황(李晃)과 결혼하고, 광둥[廣東]의 광동국립대학 문학과에 입학해 3년간 수학하였다.
1926년 4월 남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주최 강연회에서 「중국정계와 오인의 관찰」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7년 6월 천도교여성동맹 창립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같은 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선전부에 배치되었다. 7월 근우회 하기 여성문제강연회에서 「환경과 인류의 관계를 논하여 조선 여성의 현상에 급(及)함」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고, 10월에는 근우회 주최 여성문제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1928년 2월 평양 광성보통학교 주최 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
1928년 4월 근우회 경성지회 중앙집행위원과 천도교여성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5월 황해도 재령, 6월 평안북도 신의주와 평안남도 평양에서 강연하였다. 7월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에서 규약수정위원 및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9월 근우회 대구지회 강연회에서 「조선여성운동의 당면 임무」를 주제로 강연하다가 대구경찰서에 피검되었다. 1929년 3월 근우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월~7월에는 경부선 방면으로 지방 순회강연을 갔다. 5월 근우회 칠곡지회 강연과 7월 근우회 영주지회 강연에서는 강연을 중지당하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1929년 8월 조선청년총동맹 임시대회에서 서기로 활동하였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신간회 중앙본부에서 모의한 민중대회 사건 관련으로 피검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0년 3월 근우회 경성지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장에 피선되었으나, 사임하였다. 4월 『삼천리』에 「산모 보호와 인종 개량 방면」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그해 4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간담회에서 상무서기에 선임되었고, 신간회 경성지회 임시대회에서는 서기장으로 활동하였다. 4월 말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위원 자격으로 함경북도연맹 사건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현지로 파견되었다. 5월 중순 귀경 중 평양 기독교청년회 주최 대강연회에서 강연 예정이었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1930년 5월 메이데이 격문 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30년 7월 조선청년총동맹 평양연맹 설립대회에서 축사와 정세 보고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중지당하였고, 근우회 해주지회 제2주년 기념식에서는 '사회의 변천과 여성의 지위'를 주제로 강연하다가 중지당하였다. 7월 24일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피검되었고, 9월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3월 25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