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공론』은 1930년 2월, 시천교에서 활동하던 신림의 주도로 『조선강단』의 이름을 바꾸어 창간한 월간 잡지이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신림이고, 인쇄인은 이기종이다. 1930년 5월에 간행 예정이었던 통권6호[제2권 4호]는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어 간행되지 못하였다. 1930년 9월 통권 제8호[제2권 7호]까지 간행하고 중단되었다. 1931년 3월 속간 3호가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 속간호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속간호는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1929년 9월 창간되었다가 간행 중단 상태에 있던 『조선강단(朝鮮講壇)』을 1930년 3월 1일, '대중공론(大衆公論)'으로 개제(改題)하여, 호수를 이어 통권 제4호[제2권 2호]로 간행하였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신림(申琳)이고, 인쇄인은 이기종(李驥鍾)이다. 신림은 시천교(侍天敎) 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로, 1928년 12월에는 시천교 청년당 발기 대회에 적극 참여하였지만, 일제의 금지로 당 결성은 무산되었다. 이후 시천교 중앙청년회 집행위원, 시천교 경성청년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림은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서울 각 학교 격문배포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일시 구금되었다. 이후 『대중공론』을 간행하게 된다. 『조선강단』에서 『대중공론』으로 제호를 변경한 것에 대해서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직격(直擊)한 태도로 이 대중 앞에서 보자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림은 1930년에는 신간회 경성지회의 대회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1931년 5월 메이데이 격문 관련으로 다시 구금되었다.
개제 변경호인 통권 제4호[제2권 2호]에는 이선근(李瑄根)의 「중국의 치외법권 철폐」 글, 배성룡(裵成龍)의 「계약에서 협약에로」 등이 수록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최상해(崔尙海)가 「부하린의 대립」을, 이향(李鄕)이 「노농노국의 주1」를, 이승원(李承源)이 주2와 농민」 등의 글을 수록하였다. 홍효민(洪曉民)의 「자본축척과 제국주의」는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김현준(金賢準)의 「조선 가족제도의 연구」와 김원석(金源碩)의 「조선인구와 식량문제」도 여러 호에 걸쳐 연재되었다. 특이하게 박문규(朴文圭)의 경성제국대학 졸업논문인 「자본축적이론」과 이효석 졸업논문인 「존 밀링턴 싱(John M. Synge)의 극」이 수록되었다. 그 외 소설, 시, 수필, 희곡 등을 여러 편 수록했는데, 안다영(安多影)과 염상섭(廉想涉), 유진오(兪鎭午), 김영팔(金永八), 이무영(李無影)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1930년 4월에 간행된 통권 제5호[제2권 3호]에는 국제문제에 대해, 배성룡이 「최근 주3의 군비상태」를, 이여성(李如星)이 「인도 우익의 대진출」을, 유기두(柳基斗)가 「총선거를 보고서」를 수록하였다. 또한 이승원(李承元)의 「변증법의 통속적 이론」이 실려 있다. 문예부분에서 이효석과 안다영, 염상섭의 소설이 수록되었고, 편집인 신림도 「예술일반에 대하야」라는 문예비평을 게재하였다.
1930년 5월에 간행 예정이었던 통권6호[제2권 4호]는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어 간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6월에 통권 제7호[제2권 5호]가 특대호로 간행되었다. 국제문제로 홍성하(洪性夏)가 「1917~1930년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운동」을, 최상해(崔尙海)가 「제2차 보선과 무산당의 합동」을, 유기두(柳基斗)가 「중국 정정(政情)의 전망」을, 배성룡이 「보호관세의 기능과 영향」을 게재하였다. ‘조선현실에 있어서 어떠한 청년을 요구하는가’란 질문으로 조선일보 안재홍(安在鴻), 조선교육협회 유진태(俞鎭泰), 중외일보 이상협(李相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두선(崔斗善), 시천교 유지훈(柳志薰), 신간회 김병로(金炳魯)와 서정희, 변호사협회 이인(李仁), 천도교 이종린(李鍾麟), 불교 한용운(韓龍雲), 조선청년총동맹 박호진(朴昊辰), 조선농민총동맹 최욱(崔旭)의 주장을 수록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선근, 서항석(徐恒錫) 등 8명의 인사와 편집부 3명 참석해서 「혼인문제 좌담회」를 수록한 점이다. 문예면에서는 여류 문인인 윤성상(尹聖相), 이숙종(李淑鍾), 손초악(孫初岳)의 수필이 특집 형태로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효석, 안다영, 송영(宋影) 등의 소설과 심훈(沈熏), 이하윤(異河潤) 등의 시가 게재되었다. 한편 대중공론사는 1930년 6월 23일, ‘인류 향상에는 과학이냐? 종교이냐?’를 주제로 제1회 남녀연합현상토론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0년 7월에 간행된 통권 제7호[제2권 6호]에는 국제문제로 인도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김장환(金章煥)이 「식민사상으로 본 인도의 장래」, 이선근이 「영인관계의 일고찰」, 김봉익(金鳳翼)이 「인도의 계급투쟁」을 수록하였다. 이여성의 「인도 좌익의 대 진출」, 최상해의 「민족문제의 편편(片片)」도 게재 예정이었으나 실리지 못했다고 편집 후기에 적고 있다. 경제문제에는 박문규(朴文奎)가 「관세전쟁」, 이긍종(李肯鍾)이 「신산업주의의 선과 악」 등이 수록되었고, 일반운동부문에 서춘(徐椿)이 「일본의 노동조합 법안」, 최상해가 「부인운동과 계급운동」, 이시목이 「농촌문제 2, 3」을 수록하였다. 문예면에는 유진오의 희곡과 송영 등의 소설, 이하윤 등의 시가 게재되었다.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1930년 9월에 간행된 통권 제8호[제2권 7호]에는 국제문제로 이선근이 「대전후 십 년간 정국추세」를, 김장환이 「영국 노동내각의 장래」, 경암(畊岩)이 「현하의 세계적 정세」를, 안재홍이 「풍운에 잠긴 제남(濟南) 쟁탈전」, 유기두(柳基斗)가 「최근 세계정국의 동향」을 게재하였다. 박문규가 「몰락과정에 있는 자본축척과 공황의 특질」을, 최상해가 「조직화된 자본주의이론과 정치적 이론」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본지에 대한 일년간 비판과 장래의 기대’라는 특집으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문예면에는 파인 김동환(金東煥), 이하윤 등의 시, 신림의 수필, 송영과 안다영의 소설 등이 수록되었다. 이렇게 통권 제8호[제2권 7호]까지 간행하고 중단되었다.
『대중공론』은 시천교와 일정한 관련이 있었는데, 잡지마다 시천교의 지방 종무부(宗務部) 등 시천교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축하 광고를 냈다. 또한 『대중공론』이 간행 중단된 이후 1930년 11월 23일, 개최된 시천교 중앙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중공론』에 관한 건을 토의하기 위해 전문위원으로 신림, 유일(兪馹), 이원홍(李源弘), 고재섭(高在燮), 김기림(金起林)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12월 20일 개최된 시천교 중앙종무위원회에서도 본부의 간부들이 『대중공론』을 간행 중단시킨 것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12월말에 박문(朴文)을 대표로 이승원(李承源), 정이경(鄭利景), 조열(趙悅)이 이사진을 새로 구성해서 속간을 준비하였다. 1931년 3월 속간 3호가 조선총독부에 압수되었다고 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 속간호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속간호는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