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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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해방 이후 성신학원 이사장,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운정(雲庭), 미야무라 요시카네[宮村淑鐘]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4년 11월 5일
사망 연도
1985년 6월 18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숙종은 해방 이후 성신학원 이사장,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04년에 출생하여 1985년에 사망하였다. 호는 운정,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야무라 요시카네이다. 1936년 성신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각종 강연회와 신문, 잡지를 통해 일제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징병 참여를 독려하였다. 해방 후 성신여자중고등학교 교장, 성신학원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3년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친족상속법」과 「가족법」 개정에 기여하였다.

정의
해방 이후 성신학원 이사장,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운정(雲庭),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야무라 요시카네〔宮村淑鐘〕다. 1904년 11월 5일 서울 효자동에서 아버지 이범규와 어머니 윤창구의 6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아버지 이범구는 대동단 사건 때 의친왕을 보위하여 만주로 피난가다가 발각되어 7년간 옥살이를 한 항일운동가였다. 1918년 4월 진명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1922년 3월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유학가서 1923년 4월 도쿄〔東京〕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해 1926년 2월에 졸업하였다. 미술학교를 재학중이던 1923년 미술가단체인 고려미술회 동인으로 참가하였고 일본도쿄유학생친목회에서 활동하였다.

귀국 후 1929년부터 1936년까지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유로 재직하면서 미술을 가르치는 한편 1929년 8월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 「얼굴」을 출품해 입선하였고 이듬해인 1930년 5월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서 「붉은 건물이 있는 교외」로 입선하였다. 1930년 5월 조선어학회 이사를 지냈고 1935년 1월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4월 태화(泰和)여학교를 인수해 성신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고,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 개최한 ‘반도신여성좌담회’에 참석하였다.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도로 결성된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부인강좌 담당강사로 위촉되었고, 같은 달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도로 조직된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 1937년 8월 전쟁비용에 보태라고 금비녀 등을 헌납하자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8년 6월 경성부 여성단체협의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비상시국과 부인보국’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고, 8월에는 동민회가 주최한 시국인식강화 부인강습회에 강사로 활동하였다. 9월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주최한 순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였고,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부인부)에 위촉되었다.

1939년 4월 성신여학교가 시천교(侍天敎) 소유의 건물을 양도받아 성신가정여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5월 ‘해군기념일을 앞두고 해군이야기를 듣자’는 제목의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같은 달 부인문제연구회와 조선교회단체연합회가 주최한 ‘내선일체의 의상 확립’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8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시국인식강연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후원하에 내선일체론을 생활양식개선으로 실현하자는 녹기연맹의 연맹원으로 활동하였고, 3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參事)에 선임되었다.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부인지도위원에 위촉되었고, 8월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하였으며, 9월 임전대책협력회 회원으로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明治町隊) 대원으로 참여해 1원짜리 ‘꼬마채권’을 팔았다. 같은 달에 최대 민간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0월에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12월에 부인대 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주최한 시국대책순회강연회 제3반 강사로 활동하였다.

1942년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이사, 1943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 실행위원을 맡아 종로지역 제1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조선교화단체협의회에서 특별지원병제를 선전하고 권유하는 전위여성격려대 일원으로 경기도 인천 · 개성 · 수원 등지에서 강연하였다. 1944년 2월 ‘황민운동’ 전개를 위한 총궐기대회 추진 실행위원을 맡아서 3월 경성 종로총궐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9월 대일본부인회조선본부에서 주최한 좌담회에 참석해 내선부인의 총궐기를 결의하였다.

각종 신문 · 잡지에 일제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총후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을 대상으로 지원병 및 징병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주요 글을 보면 「물자절약이야기」(『조선일보』, 1938.9.11), 「반도부인과 근로봉사」(『총동원』, 1939.8), 「총후보국은 내선부인의 협동에서」(『경성일보』, 1940.3.10), 「자진하여 저금합시다」(『매일신보』, 1940.12.14), 「여성과 국민총력」(『국민총력』, 1941.2), 「전시국민생활」(『경성일보』, 1942.1.13), 「징병과 어머니의 길, 복종의 정신」(『춘추』, 1944.1), 「참정권과 여성의 각오 더욱 빛날 내조의 공」(『매일신보』, 1945.3.21) 등이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평의원으로 참여하였고, 9월 성신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김활란(金活蘭), 유각경(兪珏卿) 등과 1946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1948년 6월 성신학원 이사장을 맡아 1962년까지 재임하였다. 교육정책 수립에 적극 관여하여 1948년 서울시교육회 이사, 1950년 1월 대한여학사회 발기인,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와 정부정책위원, 1954년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여권신장에 앞장서서 1959년 김활란, 박에스더와 함께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설립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1962년 대한사립중등교육 윤리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63년 성신여자실업초급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국제여성단체협의회 제75주년 총회 한국대표로 활동하였다. 1964년 숙명학원 이사장, 1965년 성신여자사범대학 학장이 되었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67년 문교재건자문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대한여학사협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73년 3월 제9대 국회의원(유정회)이 되어 「친족상속법」개정안 등 여성의 사회적 차별 철폐와 「가족법」 개정에 기여하였다. 1977년 한글학회 이사, 1978년 학교법인 성신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1984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명예인류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5년 광복 10주년 기념 공로표창을 비롯하여 1956년 서울시 교육공로 표창,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 1965년 서울시 교육공로 특별상,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1972년 제1회 외솔상, 1972년 사학재단연합회 사학육성 특별공로상, 1984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명예인류문화학박사 학위 등을 받았다. 1985년 6월 18일 숙환으로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8(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 2(민족문제연구소, 2009)
『경향신문』(1972.6.10)
『매일신보』(1945.9.2)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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