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산은 일제강점기 미 해군 최초 아시아계 여성 장교가 되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여성 군인이다.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이다.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입학해서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으로 편입하여 1940년 졸업하였다. 1942년 해군 웨이브 부대의 여성 장교 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하였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하였다. 이후 장교가 아닌 부사관으로 재차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장교 후보학교 추천을 받았고, 과정 수료 후 미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 해군 제대 후에는 비밀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일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필드하키와 소프트볼 선수였으며,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 입학해서는 야구 선수로 활약하였다. 이후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으로 편입하여 1940년 졸업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국에 살고 있던 한인 1.5세대나 2세대 250여 명이 군인으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당시 해군은 여군 입대에 대해 폐쇄적이고 보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여성해군예비병법」이 통과되면서 여성 군인들은 남성과 동등한 조건을 가지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제약이 많았다. 1942년 안수산은 해군 웨이브(WAVE) 부대의 여성 장교 훈련 프로그램에 지원하였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하였다. 이후 장교가 아닌 부사관으로 재차 지원해 합격하였다. 부사관 훈련을 마치고, 애틀랜타에 있는 링크 모의비행 훈련학교에 배치되었다. 1943년 3월 애틀랜타 지역 언론에 「한국 영웅의 핏줄, 자랑스럽게 웨이브 대원이 되다」라는 취재 기사가 실렸다.
모의 비행 교관으로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장교 후보학교 추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메사추세츠주 노스햄스턴 스미스 컬리지 근처에 있는 미 해군 예비군 장교교육 학교[United States Naval Reserve Midshipmen's School]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종 차별과 편견에 맞서며 고된 훈련과 시험을 받았는데, 특히 포격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과정 수료 후 해군 소위로 임관한 안수산은 미 해군 최초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장교가 되었다.
당시 웨이브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 전역에서 2만여 명의 여성 장교와 7만여 명의 여성 사병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유색 인종은 2명의 장교와 70여 명의 사병뿐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안수산은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쇼에까지 출연하였는데, 당시 해군은 안수산을 홍보에 적극 이용하였다. 저명한 한국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배경과 아버지의 뜻을 이어 일제와 싸운다는 이야기, 미 해군 최초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장교라는 점 등이 미국 사회와 대중의 흥미를 끌었다. 안수산에 대한 당시 미국 언론의 보도는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애국심 고취와 전쟁 참여를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안수산은 1946년 8월 대위로 해군을 제대하였다. 그 후 워싱턴 DC에 있는 국가안보국[NSA]에서 암호 해석을 주로 하는 비밀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일하였다. 1947년 4월, 그녀가 살고 있던 버지니아주의 「인종간결혼금지법」을 피해, 워싱턴 DC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프랭크 커디(Frank Cuddy)와 결혼하였다. 1959년 국가안보국에서 은퇴하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해 레스토랑을 운영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 도산공원 건립 계획이 진행되면서 한국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천안 독립기념관에 안창호 관련 자료를 기증하였다. 여러 해군 행사와 한인 행사에서 강연을 하다가, 2015년 6월 24일 100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2006년 아시안 아메리칸 저스티스 센터에서 수여하는 ‘미국인 용기상’[American Courage Award]을 한국계 최초로 수상하였다. 202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