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련은 도산 안창호의 아내로 일제강점기 미주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안혜련, 헬렌 안, 이헬렌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884년(고종 21)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했다. 1902년 안창호와 혼인하여 미국으로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였다. 1905년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부인친애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을 모금하였고,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창호가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가사를 책임지며 재미한인사회의 대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혜련(李惠鍊)은 일제강점기 미주(美州)의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의 아내이다. 본관은 안성(安城)이며, 안혜련, 헬렌 안(Helen Ahn), 이헬렌 등의 이름도 사용하였다. 1884년 4월 21일 평남 강서군(江西郡) 보림면(普林面) 화학리(和鶴里)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李錫觀)의 2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897년 안창호와 약혼하였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혼인하고 그 다음날 미국으로 떠나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남편 안창호가 미주를 떠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백인 집의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 해주고 맏아들 필립과 함께 과일 가게를 운영하며 가사를 책임졌다. 1938년 안창호가 서거한 이래 5남매를 키우며 재미한인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1963년 막내 안필영(당시 36세)과 함께 61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으며 남편을 대신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969년 4월 21일 86세의 생일날에 사망하였다. 유해는 1973년 11월 10일 서울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어, 망우리 묘소에서 이장한 도산의 유해와 함께 공원내 묘지에 안장되었다.
1905년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共立協會)를 결성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안창호가 미주와 중국,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지원하였다. 3 · 1운동의 소식을 듣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친애회(婦人親愛會)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후일 미주의 여성단체가 통합된 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에서 국민 의무금, 이십일 예납금, 국민회 보조금, 특별 의연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 회원으로서 전시 지원 활동을 펼치며, 재미한인사회의 대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여자애국단에서는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였다. 또 중국군에게 겨울옷을 보내기 위한 기금 모금에 나서 난민 구제 의연금을 쑹메이링[宋美齡]에게 송금해 주었으며, 일화배척운동(日貨排斥運動)에도 열렬히 참가하였다. 1940년 중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소식이 전해오자 대한여자애국단은 1940년 10월 총부 임원회를 개최해 광복군 후원금 500달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앞으로 송금하였다.
1946년 1월 6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열린 신년도 첫 총회임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제6대 총단장에 선출되었다. 쿠바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노동정지를 당하고 극심한 생활난으로 구제를 요청해오자 각 지부별 구제금 모금에 나서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한편, 6 · 25전쟁 동안에도 적십자와 피난민을 돕기 위해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조직하여 자원봉사하며 전쟁 중에 있는 고국으로 옷가지, 약품, 담요 등의 갖가지 물건을 보내어 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62년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43주년 기념일에는 대한여자애국단에 기여한 공로로 기념품을 증정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