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일기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농민 김영순이 1914년~1988년까지 74년간 작성한 생활 일기이다. 여러 종류의 일기장을 이용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예수교서회 간행 일기장, 박문관 간행 일기장, 적선관 간행 일기장 등을 이용했으며 직접 일기장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일기장이나 공책을 활용하여 작성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는 수첩에 일기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영순(金永淳)은 1896년에 경상남도 김해군 장유면에서 태어나 1993년 사망했다. 정규 교육은 받은 적이 없고, 가학(家學)과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쳤다. 그의 나이 18세인 1914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작성했는데, 한글을 위주로 부분적으로 국한문과 일본어를 병용하였다. 생업이 농사였기 때문에 일기 내용의 상당 부분이 농사 관련 내용이다. 또한 일상 생활의 일들, 생활용품의 구입과 지출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영순은 일찍부터 기독교에 귀의했고, 기독교인으로 교회를 통한 교육 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관동리 마을 내 1908년에 건립된 관동교회에 다녔고, 기독교 장로를 역임하였다. 또한 부산이나 마산에서 진행되는 종교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때문에 일기에는 성경 공부 내용과 교회 활동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일기에는 김해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주요한 일들과 각종 사건 사고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일기는 1988년 12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김영순 일기(金永淳日記)』는 여러 종류의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기 것만을 보면 예수교서회(耶蘇敎書會)에서 간행한 일기장에 1914년, 193133년 일기가 기록되었다. 박문관(博文館)에서 간행한 일기장을 사용해서 1916년, 1921년, 193741년 일기를 기록하였고, 적선관(積善館)의 일기장에는 1920년, 193436년 일기를 기록하였다. 일기장을 직접 제작해서 191719년, 1923~29년 일기를 기록하였다. 적접 제작한 일기도 인쇄된 일기의 형식을 그대로 그려서 사용했다.
일기의 일자 표시는 1914년부터 양력을 기준으로 기록했는데, 1924년 2월 5일[음력 1924년 1월 1일]부터 1931년 11월 24일[음력 1931년 12월 31일]까지는 음력을 사용했다. 1932년 1월 1일[음력 1931년 11월 25일]부터는 양력을 다시 사용했다. 1932년부터 주1으로 활동한 것이 다시 양력으로 변화한 것과 관련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김영순은 설과 추석 등 명절은 음력으로 지냈다. 가족의 생일도 음력으로 기억하고 있다. 농민이었기 때문에 일상적 삶에서는 음력이 더 익숙하고 습관화되어 있었다.
1919년 4월 10~12일에는 장유 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해 기술한 대목이 있다. 1923년부터 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교의 운영과 관련한 부분도 기록되어 있다. 김영순은 자작지를 조금 가지면서 소작을 하는 자소작농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그의 농지 경영과 비료 사용 등의 내용도 자주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1932년부터 소와 닭을 기르기 시작했고, 1939년에도 양도 길렀다.
그의 일기에는 축산 관련 일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영순은 일제하 식민통치 말단 기구인 면의 무급 보조원인 구장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일기에는 구장이 담당한 다양한 일과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 따르면 구장은 식민당국의 지방 지배를 위해 각종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집행하며, 마을 내부의 정보 조사, 각종 세금 징수, 출생 · 혼인 · 사망 · 이동 등의 인구 관리, 부역 노동 동원 등을 맡아 수행했다. 일기에는 김영순의 마을 내 다양한 네트워크와 교류도 기록되어 있다. 구성원간의 차용 문제나 금융조합 이용 내용도 알 수 있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김영순의 일기는 내용상에서 큰 변동이 없었다. 일상적인 농가 생활과 교회 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가 거주하는 지역이 경상남도 김해이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때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일기장이나 공책을 활용하여 일기를 작성했는데, 김영순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1970년대 중반부터는 수첩을 이용해서 일기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