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두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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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 교육자.
이칭
이칭
각천(覺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사망 연도
1974년
본관
東州(鐵原)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흥업구락부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최두선은 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교육자이다. 1894년 서울 출생으로 육당 최남선의 동생이다.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독일 유학 후 귀국해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복임했다. 1947년 동아일보사 사장, 1953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1963년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활동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와 1968년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2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언론인 · 교육자.
내용

1894년 서울 출생으로, 호는 각천(覺泉)이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동생으로, 휘문의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다. 1918년 김성수가 경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에 취임했고, 다음해 교장이 되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며 1920년 6월 결성된 조선교육회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1년 3월 총독부 촉탁으로 보통학교 교과용 도서 언문철자법을 조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2월에는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해 활동했으나 1922년 5월 독일로 유학 길을 떠났다.

독일 마부르크대학 · 예나대학 ·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했으며, 1925년 10월 귀국해 곧바로 중앙고보 교장으로 복임(復任)했다. 1929년 재단법인 중앙학원 창립과 동시에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31년 5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임했다. 1932년 3월 김성수, 김용무와 함께 보성전문학교 이사로 취임했다.

1935년 3월 16일 박흥식, 김재수와 함께 경성방직 취체역으로 선출되었으며, 1938년 상무취체역이 되었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피체되어 약 3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으며 보성전문 상무이사직에서 퇴임했다. 1939년 2월 6일 창립된 대동직물주식회사 취체역으로 선임되었으며, 만주 진출을 위해 12월 18일 창립한 남만방적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10월 경성방직 전무, 1945년 사장으로 취임했다.

해방 후인 1946년 10월 한국민주당이 기구를 개혁하고 김성수가 위원장이 되었을 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1월 24일 우익진영의 42단체가 연합해 결성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2월 동아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1948년 3월 5·10선거를 앞두고 조직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10월부터 민주국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51년 10월 전국대의원회 부의장, 1952년 10월 중앙상무집행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53년 11월 23일 민주국민당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5년 민주당 발족을 계기로 정계를 떠났으며, 1956년에는 유엔가입전국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1월 10일 조경규(민의원 부의장),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박영출(민의원 외무위원장)과 함께 유엔 민간대표로 선출되어 유엔총회 한국대표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 6월 국제연합한국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8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출되었다. 9월 17일 유엔총회 파견대표단의 대표로 10월 20일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유엔 가입을 위해 활동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후 군사정부는 미국의 이해와 지지를 촉구하기 위해 민간사절을 파견했는데, 이때 김활란(학계 대표), 한경직(종교계 대표) 등과 함께 언론계 대표로 선출되어 민간사절단으로 6월 20일 미국으로 건너가 미 정부당국자, 민간지도자, 교포들과 접촉해 활동을 전개하고 7월 18일 귀국했다.

1963년 7월 31일 재임 만 16년 6개월 만에 동아일보 사장직에서 퇴임했다. 1963년 8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선되었으며 1963년 12월 제3공화국 초대 내각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발족 당시부터 ‘방탄내각(防彈內閣)’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당과 행정부 사이의 갈등, 대일굴욕외교반대 등 난국에 부딪쳐 집권 5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1964년 5월 9일에 사퇴했다.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활동하며 7월 17일 서독정부의 초청을 받아 서독을 방문해 적십자사업을 시찰했으며, 1965년 2월 아프리카친선사절단 단장으로 세네갈, 니제르, 카메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봉 등 아프리카 9개국을 순방했다.

1966년과 1969년에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재차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71년 8월 12일 성명을 통해 “적십자정신에 따라 남북 간의 순수한 인도적 문제들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한 ‘남북이산가족찾기 회담’을 제의하여 1971년 9월 20일부터 예비회담이 개막되었고, 본 회담이 1972년 8월 29일로 예정된 가운데 8월 8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1974년 9월 9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8월 고려대학교와 1968년 12월 와세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상훈으로는 1964년 10월 독일 대공로십자성훈장, 1966년 2월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 1972년 8월 국민훈장무궁화장 등이 있다.

참고문헌

『고려대학교 90년지』(고려대학교 90년지 편찬위원회, 1995)
『대한적십자사 70년사』(대한적십자사, 서울신문사, 1977)
「남북대화의 전위적 제의 71년을 움직인 사람들: 최두선 총재」(『월간중앙』45, 1971)
「9일 새벽 최두선 박사 별세 향년 81세」(『매일경제』, 1974.9.9)
대한적십자사(www.redcross.or.kr)
집필자
임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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