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창성군"
검색결과 총 7건
고려 후기에, 판밀직, 평리, 창성군 등을 역임한 문신.
노진 (盧稹)
고려 후기에, 판밀직, 평리, 창성군 등을 역임한 문신.
경창군은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서(庶) 9남이다. 어머니는 홍여겸의 딸인 정빈 남양홍씨이며, 선조의 서 8녀 정정옹주가 친누나이다. 8세에 봉군되었다. 15세에 부사(府使) 증 좌의정 조명욱(曺明勗)의 딸 창녕조씨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고, 측실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인조 때에 종부시 도제조와 총친부 유사당상을 지내면서 종친을 관리하였다.
경창군 (慶昌君)
경창군은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서(庶) 9남이다. 어머니는 홍여겸의 딸인 정빈 남양홍씨이며, 선조의 서 8녀 정정옹주가 친누나이다. 8세에 봉군되었다. 15세에 부사(府使) 증 좌의정 조명욱(曺明勗)의 딸 창녕조씨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고, 측실에게서 2남 2녀를 두었다. 인조 때에 종부시 도제조와 총친부 유사당상을 지내면서 종친을 관리하였다.
북한의 평안북도(平安北道) 북동부에 있는 군(郡)이다. 동쪽은 운산군(雲山郡)과 자강도(慈江道)의 우시군(雩時郡) · 송원군(松源郡), 서쪽은 창성군(昌城郡) · 대관군(大館郡), 남쪽은 태천군(泰川郡), 북쪽은 벽동군(碧潼郡)과 접하고 있다. 1952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신설하였다. 대표적 하천으로는 창성강(昌城江)과 그 지류인 동창강(東創江)이 있다. 농산업과 축산업의 비중이 크다. 동창강가에는 예로부터 ‘청산팔경(靑山八景)’의 하나로 이름이 나 있는 당아산(當峨山)이 있는데 이곳은 동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동창군 (東倉郡)
북한의 평안북도(平安北道) 북동부에 있는 군(郡)이다. 동쪽은 운산군(雲山郡)과 자강도(慈江道)의 우시군(雩時郡) · 송원군(松源郡), 서쪽은 창성군(昌城郡) · 대관군(大館郡), 남쪽은 태천군(泰川郡), 북쪽은 벽동군(碧潼郡)과 접하고 있다. 1952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군을 신설하였다. 대표적 하천으로는 창성강(昌城江)과 그 지류인 동창강(東創江)이 있다. 농산업과 축산업의 비중이 크다. 동창강가에는 예로부터 ‘청산팔경(靑山八景)’의 하나로 이름이 나 있는 당아산(當峨山)이 있는데 이곳은 동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대유동광산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로동자구에 있는 금광이다. 대유동광산은 1901년 프랑스인 살타렐이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사금 채취로 유명하였다. 1914년 500명의 광부가, 1937년 일본광업에 매각될 당시에는 3,800명의 광부가 3교대로 일하였다. 당시 관리자의 잔인한 대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담은 협박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행정 주소 변경 전 주소는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이었으며, 북한의 주요 금광 중 하나로 꼽힌다.
대유동광산 (大楡洞鑛山)
대유동광산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로동자구에 있는 금광이다. 대유동광산은 1901년 프랑스인 살타렐이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사금 채취로 유명하였다. 1914년 500명의 광부가, 1937년 일본광업에 매각될 당시에는 3,800명의 광부가 3교대로 일하였다. 당시 관리자의 잔인한 대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담은 협박장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행정 주소 변경 전 주소는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이었으며, 북한의 주요 금광 중 하나로 꼽힌다.
성사달은 고려 후기에 교주도병마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창성군에 봉해진 문신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공민왕 대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로 등으로 거듭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1364년(공민왕 13) 동북면에 침입해 온 여진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성사달 (成士達)
성사달은 고려 후기에 교주도병마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창성군에 봉해진 문신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성균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공민왕 대 홍건적 제2차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로 등으로 거듭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1364년(공민왕 13) 동북면에 침입해 온 여진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창성읍지』는 1899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채색 지도 1장을 실었다. 일반적인 읍지 체제를 따라 구성하였는데, 호구와 전답 항목에 1895년의 수치와 증가 추세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눈에 띈다.
창성읍지 (昌城邑誌)
『창성읍지』는 1899년 평안북도 창성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간행한 읍지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책 첫머리에 채색 지도 1장을 실었다. 일반적인 읍지 체제를 따라 구성하였는데, 호구와 전답 항목에 1895년의 수치와 증가 추세를 상세하게 기재한 점이 눈에 띈다.
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김홍빈 (金洪斌)
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