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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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다. 영국인이 경영하던 문평제유공장의 일본인 간부들의 민족 멸시·차별에 항의한 파업이 발단이 되었다. 경찰의 비호 속에 회사의 탄압이 거세지자 원산노동연합회가 전면에 나서면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어용단체 함남노동회를 만들어 원산노동연합회 말살을 시도했고 경찰은 주요간부 검속으로 이를 도왔다. 전국 각지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3개월 동안 강인하게 투쟁했으나 노동자측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원산총파업 (元山總罷業)
원산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다. 영국인이 경영하던 문평제유공장의 일본인 간부들의 민족 멸시·차별에 항의한 파업이 발단이 되었다. 경찰의 비호 속에 회사의 탄압이 거세지자 원산노동연합회가 전면에 나서면서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원산상업회의소는 어용단체 함남노동회를 만들어 원산노동연합회 말살을 시도했고 경찰은 주요간부 검속으로 이를 도왔다. 전국 각지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3개월 동안 강인하게 투쟁했으나 노동자측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대구 십일사건 (大邱 十一事件)
1946년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사건.
신전술은 1946년 7월 이후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해 채택한 전술이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이나 적대 행위를 자제하는 협력조합전술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술로 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인 투쟁과 물리적 저항을 하면서 미군정과 남한의 우익을 차별해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채택하였다. 미군정에 대한 우의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중을 조직해 단결시키고 국내외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점차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신전술 (新戰術)
신전술은 1946년 7월 이후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대해 채택한 전술이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이나 적대 행위를 자제하는 협력조합전술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술로 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적극적인 투쟁과 물리적 저항을 하면서 미군정과 남한의 우익을 차별해 대응하는 이중전술을 채택하였다. 미군정에 대한 우의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군중을 조직해 단결시키고 국내외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점차 대중투쟁을 통해 미군정의 통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으로 전환되었다.
3월 총파업은 1947년 3월 2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의 ‘남조선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가 전국적인 ‘24시간 총파업투쟁’을 벌인 사건이다. 1946년 9월 전평이 주도한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생활 조건은 개선되지 못했다. 이에 전평은 1947년 3월 미군정에게 노동자의 해고, 테러, 폭압을 근절하고 노동자 생활을 확보해달라고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9월 총파업과 비교해 더 조직적· 정치적이었으나, 규모면에서는 미약하였다. 이 파업으로 약 2,000여 명이 검거되면서 조직이 손실되어 전평의 조직력은 약화되었다.
3월 총파업 (三月 總罷業)
3월 총파업은 1947년 3월 2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의 ‘남조선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가 전국적인 ‘24시간 총파업투쟁’을 벌인 사건이다. 1946년 9월 전평이 주도한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생활 조건은 개선되지 못했다. 이에 전평은 1947년 3월 미군정에게 노동자의 해고, 테러, 폭압을 근절하고 노동자 생활을 확보해달라고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9월 총파업과 비교해 더 조직적· 정치적이었으나, 규모면에서는 미약하였다. 이 파업으로 약 2,000여 명이 검거되면서 조직이 손실되어 전평의 조직력은 약화되었다.
황태성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6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20년대 김천과 상주 등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 활동 중 체포되어 2년을, 출소 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어 혁명위원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황태성 (黃太成)
황태성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역성 부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6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20년대 김천과 상주 등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 활동 중 체포되어 2년을, 출소 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9월 총파업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어 혁명위원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이덕구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3·10총파업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교사를 그만둔 뒤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라산으로 입산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봉기에 참여하였고, 조천, 제주, 구좌면 출신들로 구성된 3·1지대 지대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사살되었다.
이덕구 (李德九)
이덕구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이후 제주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47년 3·10총파업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교사를 그만둔 뒤 남로당 제주도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라산으로 입산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봉기에 참여하였고, 조천, 제주, 구좌면 출신들로 구성된 3·1지대 지대장을 맡았다. 같은 해 8월부터는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사살되었다.
화물운송 특수고용직 노동자연대는 2002년 화물운수업종 특수고용직들의 권익을 위해 출범한 단체이다. 화물운송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영업자로 분류되어 「근로기준법」에 의거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로 2002년 일종의 화물연대 조합이 출범하였다. 조합은 설립 직후부터 총파업을 계속하여 2003년 '5.15노정합의'를 맺고,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 및 '안전운임제' 시행을 이끌어내는 등 화물운송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화물운송특수고용직노동자연대 (貨物運送特殊雇傭職勞動者連帶)
화물운송 특수고용직 노동자연대는 2002년 화물운수업종 특수고용직들의 권익을 위해 출범한 단체이다. 화물운송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영업자로 분류되어 「근로기준법」에 의거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로 2002년 일종의 화물연대 조합이 출범하였다. 조합은 설립 직후부터 총파업을 계속하여 2003년 '5.15노정합의'를 맺고,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 및 '안전운임제' 시행을 이끌어내는 등 화물운송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노동법개정파문(勞動法改定波紋)은 1996년 12월 26일, 여당 의원에 의해 자본의 규제 완화와 유연생산체제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된 사건이다. 법안 통과 소식에 양대 노동조합총연맹은 총파업에 들어가고, 야당 3당이 무효화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김영삼이 1997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정안 철회 의사가 없음을 기만적 언사로 밝히면서 개정안 반대 투쟁은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1997년 여야 합의로 법안이 재개정되며 파문은 일단락되었다.
노동법개정파문 (勞動法改定波紋)
노동법개정파문(勞動法改定波紋)은 1996년 12월 26일, 여당 의원에 의해 자본의 규제 완화와 유연생산체제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된 사건이다. 법안 통과 소식에 양대 노동조합총연맹은 총파업에 들어가고, 야당 3당이 무효화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김영삼이 1997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정안 철회 의사가 없음을 기만적 언사로 밝히면서 개정안 반대 투쟁은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1997년 여야 합의로 법안이 재개정되며 파문은 일단락되었다.
쌍용자동차(雙龍自動車) 사건(事件)은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대량 해고에 반대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의 파업 · 점거 투쟁이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사건이다. 2009년 1월 9일 상하이자동차가 경영권을 포기하고 4월 8일 사측이 대량 해고를 예고하자,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5월 22일 평택공장을 점거해 8월 6일 경찰 병력에 의해 강제 진압될 때까지 77일 동안 투쟁을 전개하였다.
쌍용자동차 사건 (雙龍自動車 事件)
쌍용자동차(雙龍自動車) 사건(事件)은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대량 해고에 반대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원들의 파업 · 점거 투쟁이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사건이다. 2009년 1월 9일 상하이자동차가 경영권을 포기하고 4월 8일 사측이 대량 해고를 예고하자,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5월 22일 평택공장을 점거해 8월 6일 경찰 병력에 의해 강제 진압될 때까지 77일 동안 투쟁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