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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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는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64년에 사망했다. 1910년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하며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며 다방면의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재임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온갖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김병로 (金炳魯)
김병로는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1887년(고종 24)에 태어나 1964년에 사망했다. 1910년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하며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며 다방면의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재임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온갖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곽상훈 (郭尙勳)
곽상훈은 동래3·1운동 참가,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 국회의장, 대통령 권한 대행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19년 고교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3·1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 검찰 차장을 지냈다. 2대∼5대 민의원, 1960년 4·19 직후 대통령권한대행, 같은 해 민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5·16군사정변 당시 민주당 탈당 후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 비난을 받았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일보 영업국장,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국회의원, 초대 법제사법위원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정치인·독립운동가.
백관수 (白寬洙)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일보 영업국장,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국회의원, 초대 법제사법위원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정치인·독립운동가.
김도연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 출생으로 1919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유학 시절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 9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미국 유학 후 1931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6년 이후 다수의 의원직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91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김도연 (金度演)
김도연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 출생으로 1919년 게이오 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유학 시절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 9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미국 유학 후 1931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6년 이후 다수의 의원직을 역임하였으며, 1967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91년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신일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1916년 조선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22년 잡지 『신생활』 기자로 많은 기사를 집필하였으며, 필화사건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1928년에 걸쳐 민족통일론에 대해서 ML파와 논쟁을 벌였다. 만주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신일용 (辛日鎔)
신일용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8·15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1916년 조선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922년 잡지 『신생활』 기자로 많은 기사를 집필하였으며, 필화사건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1928년에 걸쳐 민족통일론에 대해서 ML파와 논쟁을 벌였다. 만주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송진우 (宋鎭禹)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21년 동아일보 3대 사장에 취임한 뒤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를 위한 브나로드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1934년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지지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윤보선 (尹潽善)
윤보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20세 때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하다가 신규식·신익희 등의 권유로 영국에 유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대립했다. 미군정청·이승만정부에도 참여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4·19 이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5·16군사정변으로 하야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15만 7천표 차이로 패배하고 이후 야권 지도자로서 민주화운동에 공헌했다.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세훈 (元世勳)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간부로 일했으며 광주학생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했다.
조병옥 (趙炳玉)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간부로 일했으며 광주학생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했다.
유진희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잡지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공간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 정치 활동에 매진하였다.
유진희 (兪鎭熙)
유진희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와 신생활사,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고, 『시대일보』, 『신계단』 등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이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잡지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공간에서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 정치 활동에 매진하였다.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전진한 (錢鎭漢)
전진한은 해방 이후 초대 사회부장관, 민정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 사회운동가이다. 1901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서울로 상경해 고학 중 1920년 기미육영회의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동지들과 ‘협동조합운동사’를 만들어 항일운동, 노동운동, 협동조합운동, 대중운동의 발판을 삼았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5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정당 부총재, 민중당 지도위원 등을 지냈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며, 1972년 4월 별세했다.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했고, 『동아일보』 창간 후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미국에 재차 유학하여 이승만 지지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로서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고, 침략전쟁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 이론가로 활동하다 암살당했다.
장덕수 (張德秀)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했고, 『동아일보』 창간 후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미국에 재차 유학하여 이승만 지지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로서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고, 침략전쟁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 이론가로 활동하다 암살당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1946년 3월 10일 서울 시천교회에서 설립된 우파 노동단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1946년 3월 10일 서울 시천교회에서 설립된 우파 노동단체.
1945년 12월 21일 서울 천도교 대강당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청년단체들을 망라해 조직된 우익청년단체 연합체.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1945년 12월 21일 서울 천도교 대강당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청년단체들을 망라해 조직된 우익청년단체 연합체.
1945년 10월 23일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기관 형성을 위해 조직된 정치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獨立促成中央協議會)
1945년 10월 23일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기관 형성을 위해 조직된 정치단체.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
민주독립당 (民主獨立黨)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
임정봉대론은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송진우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 및 임정 세력도 환국과 함께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행보하였다. 1947년에 조직한 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 보류와 김구의 남한단독선거반대와 남북협상 추진으로 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임정봉대론 (臨政奉戴論)
임정봉대론은 해방 직후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민당계 및 임정계열 인사들이 추진한 운동이다. 해방 직후 송진우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정통으로 환영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구 및 임정 세력도 환국과 함께 특별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행보하였다. 1947년에 조직한 국민회의를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기관으로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 보류와 김구의 남한단독선거반대와 남북협상 추진으로 임정법통론을 포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한성은행 본정지점 지배인 대리, 동아일보 여수지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문평 (金汶枰)
일제강점기 때, 한성은행 본정지점 지배인 대리, 동아일보 여수지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김종선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 단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한 정치인·기업인이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세브란스의약품주식회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출생으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자산가이자 전라도 대지주가 되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운동과 소년운동을 이끌었으며, 다양한 구제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산업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피살되었다.
김종선 (金鍾善)
김종선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 단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한 정치인·기업인이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세브란스의약품주식회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출생으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자산가이자 전라도 대지주가 되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운동과 소년운동을 이끌었으며, 다양한 구제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산업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