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흥업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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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해방 이후, 민의원, 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이갑성 (李甲成)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해방 이후, 민의원, 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했고, 『동아일보』 창간 후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미국에 재차 유학하여 이승만 지지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로서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고, 침략전쟁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 이론가로 활동하다 암살당했다.
장덕수 (張德秀)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했고, 『동아일보』 창간 후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미국에 재차 유학하여 이승만 지지 활동을 하다 귀국했다.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간부로서 『사상보국』의 발간을 주도했고, 침략전쟁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우파 이론가로 활동하다 암살당했다.
태평양문제연구회는 1925년 11월 동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단체이다. 1925년에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국내에 돌아온 신흥우, 유억겸, 송진우 등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설립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모임이 열렸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및 『동아일보』 ‧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과 연결된 비밀조직인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태평양문제연구회 (太平洋問題硏究會)
태평양문제연구회는 1925년 11월 동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단체이다. 1925년에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국내에 돌아온 신흥우, 유억겸, 송진우 등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설립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모임이 열렸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및 『동아일보』 ‧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과 연결된 비밀조직인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적극신앙단은 1932년 6월 신흥우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물들이 ‘적극신앙’에 동의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피안적·관념적인 천국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 개혁, 민족의식 고취, 독립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새로운 생활 신앙 선언과 21개조 실천 강령을 구상하고, 선교사들과 목사들에게 개혁구상을 밝히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참여 인물들은 기호지역 출신 감리교와 장로교인들로 3·1운동 이후 YMCA, 신간회 등 여러 민족·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35년 신흥우가 YMCA를 떠나면서 적극신앙단도 그 중심을 잃고 사실상 해체되었다.
적극신앙단 (積極信仰團)
적극신앙단은 1932년 6월 신흥우를 비롯한 기독교계 인물들이 ‘적극신앙’에 동의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피안적·관념적인 천국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 개혁, 민족의식 고취, 독립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새로운 생활 신앙 선언과 21개조 실천 강령을 구상하고, 선교사들과 목사들에게 개혁구상을 밝히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참여 인물들은 기호지역 출신 감리교와 장로교인들로 3·1운동 이후 YMCA, 신간회 등 여러 민족·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35년 신흥우가 YMCA를 떠나면서 적극신앙단도 그 중심을 잃고 사실상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