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석(郭鍾錫)
이 때 이항로(李恒老)의 주리설을 변론하면서 기호학계의 논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1895년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때마침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안동과 제천 지역의 의병 진영을 살피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거창의 다전(茶田)으로 옮겨 살았다. 옮긴 직후에 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의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당시의 유학자가 위정척사적(衛正斥邪的)이어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과 비교할 때, 만국공법(국제법)에 호소하는 특수성을 보이고 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 전국에서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이 때 1899년 중추원 의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집(寒洲集)』을 편찬하였으며, 『남명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