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진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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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모는 의사로 활동하다가 제4대,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이자 의료인이다.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이며,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천안군과 강원도 인제군, 원주군에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중앙 정계에 뛰어들어 민주당에서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원주시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당 신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박충모 (朴忠模)
박충모는 의사로 활동하다가 제4대,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이자 의료인이다.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이며,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천안군과 강원도 인제군, 원주군에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중앙 정계에 뛰어들어 민주당에서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원주시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당 신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오재경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중앙시험소 서무주임, 내무부 총무과장, 공보실장, 공보부장관, 극동방송국 이사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언론 경영인이다. 1919년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릿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5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만 정부 공보실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61년 7월에는 공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극동방송국 이사장과 CBS 운영이사장, 동아일보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언론 경영에도 관여하였다.
오재경 (吳在瓊)
오재경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중앙시험소 서무주임, 내무부 총무과장, 공보실장, 공보부장관, 극동방송국 이사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언론 경영인이다. 1919년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릿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5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만 정부 공보실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61년 7월에는 공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극동방송국 이사장과 CBS 운영이사장, 동아일보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언론 경영에도 관여하였다.
이철원은 일제강점기~현대에 3·1운동에 참여하고, 미군정청 공보부장, 대한민국 공보처장 등으로 활동한 관료이다. 1900년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하였다. 이후 중국과 프랑스, 미국 등에서 유학하였다. 귀국 후 흥업구락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공보부장, 대한민국 국회사무총장, 공보처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철원 (李哲源)
이철원은 일제강점기~현대에 3·1운동에 참여하고, 미군정청 공보부장, 대한민국 공보처장 등으로 활동한 관료이다. 1900년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하였다. 이후 중국과 프랑스, 미국 등에서 유학하였다. 귀국 후 흥업구락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 공보부장, 대한민국 국회사무총장, 공보처장 등을 역임하였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공원이다. 제주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1995년 8월 위령공원 조성계획 발표를 시작으로 2003년부터 순차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주요 시설로서 위패봉안실, 위령제단·위령광장, 봉안관,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4·3평화교육센터·어린이체험관 등이 있다.
제주 4·3평화공원 (濟州 4·3平和公園)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공원이다. 제주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1995년 8월 위령공원 조성계획 발표를 시작으로 2003년부터 순차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주요 시설로서 위패봉안실, 위령제단·위령광장, 봉안관, 제주4·3평화기념관, 제주4·3평화교육센터·어린이체험관 등이 있다.
진승국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여러 학교의 교원과 각종 청년단체를 거쳐 자유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다. 1914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릿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외국어학원, 숙명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교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에는 우익 청년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 여당인 자유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자유당 내 비족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5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정계 활동이 없다가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진승국 (陳承國)
진승국은 일제강점기~현대에 여러 학교의 교원과 각종 청년단체를 거쳐 자유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다. 1914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릿쿄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외국어학원, 숙명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교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에는 우익 청년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 여당인 자유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자유당 내 비족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5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정계 활동이 없다가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최규하는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 관료,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10대 대통령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외무부에 종사하였다. 1976년 3월 제12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1979년 10·26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았다.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최규하 (崔圭夏)
최규하는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 관료,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10대 대통령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외무부에 종사하였다. 1976년 3월 제12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1979년 10·26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았다.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최창순은 대한민국 사회부장관을 역임한 관료, 의사이다. 1948년 서울시 보건위생국장을 맡았고, 1949년 대한민국 사회부차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제2차 세계보건기구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세계보건기구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2년에는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사회부장관에서 물러난 후 대한소년화랑단 단장을 맡았는데, 이 단체의 비리 문제로 인해 조사를 받았다.
최창순 (崔昌順)
최창순은 대한민국 사회부장관을 역임한 관료, 의사이다. 1948년 서울시 보건위생국장을 맡았고, 1949년 대한민국 사회부차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제2차 세계보건기구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세계보건기구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2년에는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사회부장관에서 물러난 후 대한소년화랑단 단장을 맡았는데, 이 단체의 비리 문제로 인해 조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