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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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봉근은 유신헌법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헌법학자이다. 1958년 서독 본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0년부터 한양대학교, 중앙대학교, 동아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헌법을 연구하였다. 1972년에 집필한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의 비상대권론』은 유신헌법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유신헌법해설』과 『통일주체국민회의론』 등을 집필하여 유신헌법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였다.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갈봉근 (葛奉根)
갈봉근은 유신헌법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헌법학자이다. 1958년 서독 본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0년부터 한양대학교, 중앙대학교, 동아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헌법을 연구하였다. 1972년에 집필한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의 비상대권론』은 유신헌법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유신헌법해설』과 『통일주체국민회의론』 등을 집필하여 유신헌법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였다.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준공한 조선총독부의 행정 시설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후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경복궁 자리에 신청사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6년 준공된 이 건물은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고, 군림하는 일본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에 의해 건물 해체가 시작되어 1996년 12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舊 朝鮮總督府 建物)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준공한 조선총독부의 행정 시설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후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경복궁 자리에 신청사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6년 준공된 이 건물은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고, 군림하는 일본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에 의해 건물 해체가 시작되어 1996년 12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박병주는 도시계획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위원 등을 역임한 도시계획학자이다. 1925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48년부터 부산공업고등학교 토목과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하였다. 1968년부터 1990년까지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경주국립공원 계획, 여의도지구 개발 계획, 잠실지구 종합 개발 기본 계획, 행정 수도 입지 선정 및 행정 수도 계획 구상 등 다양한 도시계획 및 국토 개발 사업에 참여하였다. 중앙도시계획위원,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박병주 (朴炳柱)
박병주는 도시계획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위원 등을 역임한 도시계획학자이다. 1925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48년부터 부산공업고등학교 토목과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3년 독도를 최초로 측량하였다. 1968년부터 1990년까지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경주국립공원 계획, 여의도지구 개발 계획, 잠실지구 종합 개발 기본 계획, 행정 수도 입지 선정 및 행정 수도 계획 구상 등 다양한 도시계획 및 국토 개발 사업에 참여하였다. 중앙도시계획위원,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양순직은 제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3선개헌을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이다. 1925년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태어났다. 1958년 해군본부 정훈차감을 지냈고, 1962년에는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과 1967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여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으며, 19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80년대에는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대표로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다.
양순직 (楊淳稙)
양순직은 제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3선개헌을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이다. 1925년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태어났다. 1958년 해군본부 정훈차감을 지냈고, 1962년에는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과 1967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여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으며, 1979년에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80년대에는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대표로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다.
황온순은 전재민과 고아 등의 구호와 보육 사업에 힘쓴 사회사업가이자 교육자이다. 1903년 황해도 연안군에서 태어났다. 1918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이화학당 유치원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해방 직후 원불교 전재민 구호 사업에 참여하였다. 1946년 서울 한남동에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고아 보육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51년에는 제주도에서 한국보육원을 운영하였다. 1970년 학교법인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황온순 (黃溫順)
황온순은 전재민과 고아 등의 구호와 보육 사업에 힘쓴 사회사업가이자 교육자이다. 1903년 황해도 연안군에서 태어났다. 1918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이화학당 유치원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해방 직후 원불교 전재민 구호 사업에 참여하였다. 1946년 서울 한남동에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고아 보육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51년에는 제주도에서 한국보육원을 운영하였다. 1970년 학교법인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김주열은 대한민국의 의거(義擧) 학생으로,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되었다. 김주열은 3월 15일 시위 당일 실종되었는데,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일어났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주열 (金朱烈)
김주열은 대한민국의 의거(義擧) 학생으로,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되었다. 김주열은 3월 15일 시위 당일 실종되었는데,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일어났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송건호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국민주 방식의 모금 운동을 토대로 1988년 일간신문 『한겨레』의 창간을 이끌었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두루 거친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중인 1975년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과 기자 대량 해임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며 자진 사임하였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아 해직 기자들과 함께 1985년 월간지 『말』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을 펼쳤다.
송건호 (宋建鎬)
송건호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으로, 국민주 방식의 모금 운동을 토대로 1988년 일간신문 『한겨레』의 창간을 이끌었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두루 거친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중인 1975년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과 기자 대량 해임 사태의 해결을 촉구하며 자진 사임하였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아 해직 기자들과 함께 1985년 월간지 『말』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을 펼쳤다.
장일순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로, 1960~1970년대 강원도 원주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생명운동을 제창한 인물이다.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지역 신용협동조합·생활협동조합 등의 설립을 주도하며 지역 운동에 헌신하였고,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명운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하며 1983년 '한살림' 창립에 기여하는 등 협동조합운동과 생명운동 확산에 공헌하였다.
장일순 (張壹淳)
장일순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로, 1960~1970년대 강원도 원주 지역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생명운동을 제창한 인물이다.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지역 신용협동조합·생활협동조합 등의 설립을 주도하며 지역 운동에 헌신하였고,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명운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하며 1983년 '한살림' 창립에 기여하는 등 협동조합운동과 생명운동 확산에 공헌하였다.
조영래는 대한민국의 인권변호사로, 『전태일평전』의 집필자이자 1980년대 노동·여성·환경 관련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인물이다.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6년간 도피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설하여 망원동 수재집단의 소송사건, 이경숙사건(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상봉동 진폐소송사건 등을 맡았다.
조영래 (趙英來)
조영래는 대한민국의 인권변호사로, 『전태일평전』의 집필자이자 1980년대 노동·여성·환경 관련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인물이다.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6년간 도피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설하여 망원동 수재집단의 소송사건, 이경숙사건(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상봉동 진폐소송사건 등을 맡았다.
최종길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자 교수로, 1973년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수사관의 고문과 폭행에 의해 숨진 인물이다. 1973년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의 조사 과정에서 간첩임을 자백하고 7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최종길의 간첩 자백 사실과 사망 현장 검증 등을 허위로 조작하였고, 그의 죽음이 고문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최종길 (崔鍾吉)
최종길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자 교수로, 1973년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수사관의 고문과 폭행에 의해 숨진 인물이다. 1973년 중앙정보부는 최종길의 조사 과정에서 간첩임을 자백하고 7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최종길의 간첩 자백 사실과 사망 현장 검증 등을 허위로 조작하였고, 그의 죽음이 고문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