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악정재 ()

당악정재 / 죽간자와 의문들
당악정재 / 죽간자와 의문들
무용
개념
고려시대 송나라의 교방악에서 유래한 궁중무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당악정재는 고려 시대 송나라의 교방악에서 유래한 궁중무용이다. 우리 음악인 향악과 중국 음악인 당악을 구분하였고 춤도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로 구분하였다. 당악정재가 상연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악지이다. 여기에 5종목의 춤추는 절차와 반주음악 및 창사가 소개되어 있다. 조선 전기 당악정재는 「금척」 등 14종목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당악정재는 당악 대신 향악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한다. 현재 당악정재는 『정재무도홀기』를 토대로 대부분 재현되고 있다. 고려시대 당악정재 등장은 궁중 공연 예술의 발전과 향악정재의 촉매재가 되었다.

정의
고려시대 송나라의 교방악에서 유래한 궁중무용.
개설

향악정재의 대칭어이다. 송나라의 교방악 곧 궁중무용을 총칭하는 당악정재는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도 향악정재와 더불어 궁중무용의 쌍벽을 이루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당악정재라는 용어가 없고, 당악 항목 아래 정재종목이 기재되었다. 여기서의 당악은 넓은 의미에서 중국의 악(樂)을 뜻한다.

당악과 구분하기 위해 우리 음악을 향악(鄕樂)이라고 하였고, 춤에도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구분하게 되었다. 원래 정재(呈才)는 기예(技藝)를 드리는 것이었으나, 이후 궁중무용의 대명사처럼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당악정재가 상연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악지에 나온다. “1073년(문종 27) 을해일에 교방여제자(敎坊女弟子) 진경(眞卿) 등 13인이 전한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연등회(燃燈會)에 쓸 것을 아뢰었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그해 11월 신해에는 팔관회를 베풀어, 임금이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악무를 관람했는데, 교방여제자 초영(楚英)이 새로 전해 온 「포구락(抛毬樂)」「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공연하였다. 「포구락」 여제자는 13인이, 「구장기별기」 여제자는 10인이 공연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1077년(문종 31) 2월의 기사에는 “임금이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서 악무를 관람했는데, 교방여제자 초영이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를 공연하였다. 이 가무는 일대(一隊)가 55인이며, 춤으로 네 글자를 만드는데, ‘군왕만세(君王萬歲)’ 혹은 ‘천하태평(天下太平)’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교방의 여제자 진경과 초영이 전한 「답사행가무」 · 「포구락」 · 「구장기별기」 · 「왕모대가무」는 고려조정에 파견된 송나라의 교방악사가 가르친 당악정재다.

1071년 송나라의 신종이 고려조정에 파견한 교방악사가 그런 당악정재를 고려의 교방여기에게 가르쳤다고 『송사(宋史)』 권15에 전한다.

1076년(문종 30)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의 관원에게 녹봉을 주는 내용이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전하는데, 당무업사(唐舞業師) 겸 창사업사(唱詞業師) 1인, 당무업사교위(唐舞業師校尉) 1인이 있었으니, 당악정재를 학습하는 체계를 이 시기에 이미 갖추었다.

고려시대의 당악정재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정재는 「헌선도(獻仙桃)」 · 「수연장(壽延長)」 · 「오양선(五羊仙)」 · 「포구락」 · 「연화대(蓮花臺)」 등 5종목으로, 춤추는 절차와 반주음악 및 창사가 소개되어 있다.

다섯 당악정재 중에 「포구락」이 제일 먼저 1073년(문종 27) 11월 팔관회에서 공연되었다. 교방여기가 춤을 추면서 포구문에 공을 던져 넣는 놀이형태인데, 무용수들이 차례로 공을 넣으면 상으로 꽃을 주고, 넣지 못하면 벌로 얼굴에 먹점을 찍어 준다. 송나라 심괄의 『몽계필담』에 의하면, 「포구락」은 이신언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명 석지무라고 하는 「연화대」는 포구락과 함께 1123년(인종 1)에 공연되었음이 『고려도경』에 전한다. 당나라 때 서역의 석국(石國)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현종 때 중국에 전래하여 송대에도 유행했다가 춤의 일부가 고려에 전래된 듯하다. 두 동녀(童女)가 합립(蛤笠)이라는 서역풍의 모자를 쓰고 연꽃 안에서 나와 춤추는 형태이다.

「헌선도」는 1167년(의종 21) 4월 연흥전에서 공연되었다고 『고려사』 권18에 전한다. 한 개만 먹어도 천 년을 넘게 살 수 있다는 복숭아 쟁반을 봉탁(奉卓)에 올리는데, 봉탁이 육각으로 된 까닭은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인 ‘남두육성’의 의미라고 한다. 「헌선도」는 귀한 분께 선도를 바치며 태양처럼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춤이다.

「오양선」은 군왕의 장수를 소망하는 내용의 당악정재이다. ‘양을 탄 다섯 신선’의 고사를 춤으로 재현한 것이다. “조고라는 사람이 초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다섯 신선이 오색 양을 타고 내려왔는데, 이때 한줄기에 여섯 개의 이삭을 갖는 ‘육수거’를 가져와 효성이 지극한 백성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수연장」은 음력 정월 보름날 군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당악정재의 공연양식은 향악정재와 비교할 때 세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는 향악정재에 없는 죽간자(竹竿子)와 여러 종류의 의물이 무대에 등장하는 점이다. 붉은 식을 칠한 깃대 끝에 빗자루처럼 생긴 가는 대나무가지를 엮어 만들었고, 나뭇가지는 붉은 실로 묶고 수정 구슬을 다는데, 이것은 언젠가 태평성대에 날아들 봉황의 보금자리와 그 먹이를 상징한다. 죽간자를 든 기녀가 무용수를 무대로 이끌고 나오는 점이 당악정재의 특징이다.

당악정재의 공연 때 사용되는 의물로는 용무늬를 그린 용선(龍扇), 봉황을 그린 봉선(鳳扇), 공작의 꼬리깃으로 장식한 미선(尾扇), 공작 모양으로 만든 작선(雀扇), 깃발대의 끝 복숭아 모양으로 장식한 인인장(引人仗), 인인장의 장대에 많은 수술을 달아서 만든 정절(旌節) 등이 사용되었다.

둘째는 정재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기녀가 부르는 한문가사의 치어(致語)와 구호(口號)가 나오는 점이다. 구호와 치어는 당악정재의 앞과 뒤에서 부르는 송축의 뜻으로 된 내용의 치사(致辭)와 시(詩) 일장으로, 치어는 대체로 변려체(騈儷體)로 되어 있고, 구호는 칠언사구(七言四句)로 되어 있다.

셋째는 춤추는 도중에 기녀가 노래부르는 창사(唱詞)가 한시인 점이다. 향악정재가 향악 반주에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르는 데 반하여, 당악정재는 당악 반주에 한문 가사를 노래한다.

조선 전기의 당악정재

조선 전기의 당악정재는 모두 14종목으로, 『악학궤범』 권4에 도설(圖說)되었다. 고려 때 공연된 당악정재 5종목이 그대로 전승되었고, 9종목이 새로 창작되었다. 조선 전기에 창작된 종목은 「금척(金尺)」 · 「수보록(受寶籙)」 · 「근천정(覲天庭)」 · 「수명명(受明命)」 · 「하황은(荷皇恩)」 · 「하성명(賀聖明)」 · 「성택(聖澤)」 · 「육화대(六花隊)」 · 「곡파(曲破)」이다.

그 중에서 「육화대」와 「곡파」는 송나라의 대곡에서 유래되었고, 나머지 7종목은 태조와 태종의 공덕을 찬양한 내용의 악장을 근거로 조선 초에 창제되었다.

여섯 명의 기녀가 꽃을 들고 추는 「육화대」는 송나라의 대곡에 나오는 화무를 본떠서 창작되었다. 그리고 『고려사』「악지」 소재의 석노교곡파와 관련된 「곡파」는 1425년(세종 7) 10월 고려 때 공연된 곡파의 절주를 기억하는 노기가 재현한 당악정재이다.

몽금척의 준말인 「금척」 및 「수보록」은 1393년(태조 2) 정도전이 창작한 악장을 바탕으로 만든 당악정재이다. 두 당악정재는 모두 태조의 건국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근천정」과「수명명」은 1402년(태종 2) 하륜의 악장을 근거로 창제되었다. 두 당악정재는 모두 태종이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오해를 풀고 황제로부터 왕의 인준을 받아 기뻐하는 내용이다.

「하황은」은 세종이 명나라의 황제로부터 왕의 인준을 받아 온 백성이 기뻐한다는 내용의 악장을 근거로 창제한 당악정재이다. 「하성명」은 1419년 변계량이 지은 하성명 악장을 바탕으로 창제되었는데, 명나라 황제가 등극한 이래 여러 상서가 나타나 우리나라 백성들이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성택」은 명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조선 초에 창제된 7종목은 모두 죽간자를 든 기녀들이 한문으로 된 구호와 치어 및 창사를 불렀다. 당악정재의 외적 형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7종목의 반주악곡은 고려 때 당악곡을 차용했다.

조선 후기의 연향 관련 의궤와 『정재무도홀기』의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전해진던 당악정재는 「헌선도」 · 「수연장」 · 「오양선」 · 「포구락」 · 「연화대」 · 「몽금척」 · 「하황은」 · 「육화대」의 8종목이었다.

순조대에는 당악정재의 형식으로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 「제수창(帝壽昌)」 · 「최화무(催花舞)」의 4종목이 새롭게 창작되었다.

조선 후기의 당악정재

조선 후기에 나타난 당악정재의 특징은 반주음악으로 당악 대신 향악을 사용한 점이다. 창사의 곡조에서 가곡의 농 · 계락 · 편을 쓰기도 했다.

형식적으로 죽간자와 의장을 쓰기도 했지만, 연향에 따라 죽간자가 생략되기도 하는 등 당악정재의 형식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당악정재가 향악정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 후기까지 궁중에서 공연된 당악정재의 무보(舞譜)는 『정재무도홀기』에 전한다. 당악정재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의 교방에서도 지속적으로 공연되었다.

고종대 의 기록인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 진주 교방에서 공연된 당악정재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공연된 당악정재로는 「연화대」 · 「육화대」 · 「포구락」 · 「헌반도(獻蟠桃, 헌선도)」였는데, 모두 죽간자가 생략되었으며, 춤 절차와 무대도구 및 의상도 궁중에 비해 간소한 형태였다.

현황

현재 대부분의 당악정재가 『정재무도홀기』를 토대로 재현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 당악정재 등장의 역사적 의미는 다음의 네 가지다. 첫째로 당악정재의 반주음악은 고려 당악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로 당악정재가 고려 조정에 뿌리를 내림으로 말미암아 궁중공연예술을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셋째, 당악정재는 향악정재의 등장을 위한 촉매재가 되었다. 넷째로 고려의 당악정재가 조선 후기 지방의 교방까지 확대되었으며, 현재까지 국립국악원에서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교방가요(敎坊歌謠)』
『악학궤범(樂學軌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진연의궤(進爵儀軌)』(1901, 1902)
『진찬의궤(進爵儀軌)』(1829)
『진작의궤(進爵儀軌)』(1828)
『증보 한국음악통사』(송방송, 민속원, 2007)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국악편』(송혜진, 두리미디어, 2007)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7)
『당악연구』(차주환, 범학도서, 1976)
『정재연구』Ⅰ(정은혜, 대광문화사, 1996)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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