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곡문집』은 조선 후기 학자 조술도의 시문집이다. 17권 9책으로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조카인 조거신(趙居信)이 저자의 유문을 수습·정리하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문집의 교정과 서문을 부탁하여 1821년에 간행했다. 조거신은 당쟁에 희생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죽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의 손자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들과 학문에만 전념하며 초야(경상북도 영양 주실)에 묻혀 지냈다.
저자의 조카〔從子〕 조거신(趙居信, 17491826)이 저자의 유적과 유문을 수습 · 정리하여,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게 문집의 교정과 서문을 부탁하였다. 이에 정종로가 저자의 족손 조근복(趙根復)과 함께 교정을 마치고 서문까지 써서 주었다고 한다. 조거신의 『매오집(梅塢集)』에 실린 「만곡집간역낙성운(晩谷集刊役落成韻)」을 근거로 『만곡문집』의 간행이 1821년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인 조술도는 당쟁에 희생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에 죽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의 손자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들과 학문에만 전념하며 초야(경상북도 영양군 주실)에 묻혀 지냈다. 조술도의 넷째 형은 마암(磨巖) 조진도(趙進道)다.
권1 · 2에 시 267수, 권37에 서(書) 167편, 권810에 잡저 22편, 서(序) 13편, 기(記) 8편, 발(跋) 16편, 잠(箴) 2편, 명(銘) 1편, 권11에 찬(贊) 2편, 상량문 3편, 애사 11편, 축문 10편, 권12에 제문 33편, 묘표 3편, 권13~17에 묘갈 15편, 묘지 10편, 행장 9편, 행록(行錄) 21편, 유사 8편, 전(傳)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중용』 · 『대학』에 관한 내용이 많다. 이기(理氣) · 심성(心性) · 예설(禮說) 등에 관한 논술과 함양(涵養) · 거경(居敬)에 대한 글도 있다. 그중 「답대산선생(答大山先生)」은 이상정(李象靖)에게 답한 글인데, 능지(能智) · 능각(能覺) · 소지(所知) · 소각(所覺)이 심이고, 능지 · 능각이 기(氣)를 중심으로 하여 동(動)에 속하고〔主於氣而屬之動〕, 소지 · 소각이 이(理)를 중심으로 하여 정(靜)에 속한다〔主於理而屬之靜〕는 내용이다.
「여윤황림(與尹篁林)」에서는 생수(生數)인 14가 사단(四端)이고, 성수(成數)인 69가 칠정(七情)인데, 이것은 하늘이 하나로부터 생수를 이루고 땅이 여섯으로부터 성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여정사앙(與鄭士仰)」 별지(別紙)에서는 도학(道學)은 학(學)을 주장하고, 도통(道統)은 행(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사단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운교문답(雲橋問答)」은 유(儒) · 불(佛) · 도(道) 3교의 사상과 학설을 인용하고 비교해 천주학(天主學)을 비판한 글이다. 「유석분합변(儒釋分合辨)」은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에 관한 학문〔佛學〕을 비판하는 논술이다. 「재거수록(齋居隨錄)」은 사람의 마음〔人心〕이 선과 악이 출입하며, 이(理)와 기(氣)가 합쳐진 것이라고 보고, 이(理)는 유무(有無)를 논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768년 9월에 관동을 다녀온 일을 쓴 「동유록(東遊錄)」, 1776년에 둘째 형 조운도(趙運道) 및 정난(鄭瀾)과 가야산(伽倻山) · 두류산(頭流山) 등지를 유람한 기록인 「남유록(南遊錄)」 등이 실려 있다.
「향음주의고(鄕飮酒儀攷)」는 1799년(정조 23)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의 향음주례에 관한 의식(儀式)을 질문한 것이다. 「농서연의(農書演義)」는 1799년에 농사를 장려하는〔勸農〕 윤음(綸音)이 내려졌을 때 현감을 대신해 지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농사와 관련 있는 여러 책에서 농업 행정 제도에 관한 것을 뽑아, ‘균민전(均民田)’ · ‘중민시(重民時)’ · ‘조작식(蚤作息)’ · ‘준구혁(濬溝洫)’ · ‘치제언(治堤堰)’ · ‘통수리(通水利)’ · ‘절민용(節民用)’ · ‘금자전(禁子錢)’ · ‘치력전과(置力田科)’ 등 농사의 급선무를 9조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