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산문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남기만의 시문집이다. 저자의 시문은 저자의 종증손 남유운의 주도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남유운은 먼저 재정을 확보하고 저자의 족후손 남공수, 종현손 남고와 함께 가장되어 오던 저자의 유집을 산정하여 4권으로 편차한 후 유후조와 이휘재의 서를 붙여 1874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행적은 사후 곧바로 아들 남경운(南景運)에 의해 정리가 되었다. 남경운은 먼저 저자의 사장(事狀) 1통을 정리하여 1800년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에게 행장을 부탁해 받고 다시 이 행장을 가지고 1813년 귀와(龜窩) 김굉(金㙆, 17391816)에게 묘갈명을 촉탁해 받아 두었다. 저자의 시문은 이후 저자의 종증손(從曾孫) 남유운(南有橒)의 주도로 정리가 완료되었다. 남유운은 먼저 재정을 확보하고 저자의 족후손 남공수(南公壽), 종현손(從玄孫) 남고(南皐)와 함께 가장되어 오던 저자의 유집을 산정하여 4권으로 편차한 후 유후조(柳厚祚)와 이휘재(李彙載)의 서를 붙여 1874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4권 2책. 권두에 유후조와 이휘재의 서문이 있다. 권1에 시 100여 제가 실려 있다. 권2에 정조(正祖)의 구언(求言)에 응한 4편의 상소와 징소(徵召)를 명하는 정조의 하유(下諭), 그리고 서(書) 29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 제문 24수, 상량문 2수, 잠(箴) 1수, 발(跋) 3수가 있고, 잡저(雜著)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기삼백주해(朞三百註解)’, 그리고 이합시(離合詩) 1수가 실려 있다. 묘지(墓誌) 2편은 부모를 위해 쓴 광지(壙記)이다. 권4는 부록으로, 행장, 묘갈명, 만사, 제문 등이 실려 있다. 권말에 간행 경위를 기록한 남고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권2에 소(疏)·서, 권3에 제문·상량문·발·잠·잡저·묘지, 권4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만사·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자연을 읊은 것과 교우들과의 수창한 시가 대부분이다.
소는 저자가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올린 ‘진시폐면군덕소(陳時弊勉君德疏)’와 ‘구언응지소(求言應旨疏)’ 등 5편이 있다. 당시의 폐단으로 적정(糴政: 환정)· 군정(軍政)· 전정(田政)·적정(籍政: 호적에 관한 정책) 등 4개항을 열거해 개혁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언적(李彦迪)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와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좌우에 두고 강론한 것, 그리고 『서경(書經)』에 있는 홍범(洪範)을 해석해 올린 것으로, 백성을 중히 여기고 임금의 덕을 닦아 태평성세를 이룩할 것을 내용으로 한 글도 있다.
서는 이빈(李檳)· 유장원(柳長源)· 김종덕(金宗德) 등 당시 명유들과 왕복한 것인데, 주로 학문을 논란하고 있다. 잠의 ‘무자기잠(毋自欺箴)’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속이지 않는 데 경계될 만한 좋은 문구를 간단명료하게 적어 놓은 것이다.
잡저의 ‘인심도심설’은 사단(四端)은 도심, 칠정(七情)은 인심이라는 선유들의 학설을 인용, 자신의 견해를 문답식으로 피력한 것이다. ‘기삼백주해’는 『서경』에 있는 기삼백을 저자 나름대로 주석을 가해 해설한 것이다. ‘책제(策題)’는 『중용』에 있는 지(智)·인(仁)·용(勇)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