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확(任碻, 1614~?)은 본관이 풍천(豊川), 자는 노유(魯攸), 호는 무은(霧隱)이다. 부친은 성균관 유생 임지도(任之道), 조부는 임선(任先), 증조는 임태신(任泰臣)이고 고조는 예조 참판 임추(任樞)이다. 권연하(權璉夏)의 서문에 의하면 그의 가계는 원래 경화 벌열이었는데 남쪽으로 내려가 몇 대를 지내게 되면서 점점 영락해진 듯하다. 임확은 재주가 출중하였으나 시운이 맞지 않아 평생 처사로 지냈으며, 경학을 업으로 삼아 인근 선비 수십 명이 그를 방문하여 가르침이 멀리까지 퍼졌다고 한다. 또한 은사를 자처하여 시문 몇 편을 제외하고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문집 앞에는 세계도가 있어 저자의 가계가 시조로부터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풍천임씨 족보에는 7세 임자순(任子順)에서 끊어져 후사가 보이지 않고, 장서각 소장 만가보에는 고조 임추에서 끊어져 후사가 보이지 않는다. 『무은일고』에 실린 세계도만이 그가 풍천임씨였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그의 아들 임세해(任世海)도 요절했다고 언급되었을 뿐 양자를 들인 기록은 보이지 않아 사실상 그의 가계는 끊어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1권 1책. 목활자본. 1867년(고종4) 후학 성종진(成鍾震)이 유고를 수습하였다. 권두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인 권연하의 서문과 권말에 성발교(成發敎)의 발문이 있다.
서문, 세계도, 시 12수, 서(書) 4편, 문인록(門人錄), 부록으로 만사(輓詞) 28편, 제문(祭文) 11편, 고유문(告由文), 축문(祝文), 봉안문(奉安文), 상향문(常享文), 상량문(上樑文), 유사(遺事), 후지(後識), 전(傳), 행적,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는 저자의 간략한 행적이 언급되었으며, 세계도에는 그의 가계가 그려져 있다. 시는 11제 15수로, 부석사와 쌍송정에서 열렸던 계회에 차운한 「차부석사계회운(次浮石寺契會韻)」, 「차쌍송정계회운(次雙松亭契會韻)」이 있는데 친구에 대한 깊은 우정과 서정적 감회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후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외서암(畏棲庵) 김추임(金秋任, 1592∼1654), 팔사(八斯) 배유화(裵幼華, 1611∼1673) 등에게 지어준 만사가 있어 그의 교유를 짐작하게 한다. 편지는 4편인데, 3편은 유암(楡巖) 배유장(裵幼章, 1618∼1687)과 주고받은 안부 편지이고, 1편은 「여문도서(與門徒書)」인데, 문도들에게 스승인 자기를 위하여 금품을 갹출하는 일이 없이 오직 공부에 힘쓸 것을 바라는 내용이다.
이후에는 34인의 인명이 기록된 문인록(門人錄)이 있다. 그중 금구성(琴九成), 금섬(琴暹) 등 금씨(琴氏)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성세찬(成世瓚), 성세유(成世瑜), 성세구(成世球), 구세망(具世望), 구세걸(具世傑), 구세필(具世弼), 배용담(裵龍潭), 배용익(裵龍翼) 등 주로 인근 집성촌 사람들을 가르친 흔적이 보인다. 금씨가 많은 이유는 그의 증조모가 금응종(琴應鍾)의 여식이기 때문이고, 성씨 삼형제는 그의 유고를 수습한 성종진의 6대조이다. 이를 통해 인근 고을의 사람들과 대를 이어 화목하게 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록으로 후인들이 지은 만사 28편이 실렸는데, 이현일(李玄逸), 권두경(權斗經), 성시하(成時夏) 등 당시 영남 석학들이 썼다. 제문 11편은 주로 후학인 금담(琴曇), 금봉지(琴鳳至) 등이 지었는데 그의 청아한 지조, 엄격한 몸가짐, 분명한 의론으로 후학들이 찾아와 그에게 배웠으며, 제사에 정성과 경건함을 다하였다는 내용들이 보인다.
『무은일고』의 내용은 임확이 남긴 시문보다 그의 문인들과 후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내용이 훨씬 많기 때문에, 시문을 통해 저자의 문학 세계를 조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임확의 문인들과 교유, 후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에 중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세계도는 끊어진 계보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고 문인록은 학맥 정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