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은 자가 수연(睡然)이며 본관은 여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이다. 그의 행장 등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10세 이전에 시부(詩賦)를 지을 줄 알았다. 23세가 되던 1586년(선조 19) 한양에서 별시에 응시하였는데, 당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음직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의윤은 고향에 내려간다는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모시고 『심경(心經)』과 성리학을 배웠다. 1590년(선조 23) 조부 이언적의 「원조오잠(元朝五箴)」을 본받아 「속원조오잠(續元朝五箴)」을 지었으니, 이에 그의 학문적 지향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해 향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왜란 중에도 이의윤은 효성을 다했다. 하지만 이듬해 부친이 전염병에 걸려 별세하고, 3년상을 치른 후 그의 아우 이의징도 별세하자 그는 쇠약해진 심신을 돌보지 못한 채 1597년(선조30)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별세한다.
스승인 한강 정구는 그에 대해 “지조가 굳세고 전심전력하여 가학을 등지지 않았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아우 이의혼은 “용모가 단정하고 자질이 순박하고 아름다우며, 침착하고 담박하고 욕심이 적으며, 뛰어나게 영리하며 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2권 1책. 권1에 시(詩) 18수, 부(賦) 2편, 논(論) 1편, 잠(箴) 2편, 잡저(雜著) 2편, 제문(祭文) 1편, 권2는 부록으로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묘갈명, 가장(家狀), 문견록(聞見錄), 경산봉안문(景山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강당상량문(講堂上樑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의윤은 시를 많이 남기지 않았았지만 대부분의 시들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학문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한강 정구가 주자의 시 “날마다 다른 일 하지 말고 서로 보며 함께 노력하세.[日用無餘功, 相看俱努力.]”라는 구절을 운자로 시를 지으라고 하였을 때 그는 인(仁)을 공경히 받들어야 나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조이복(曺以復)에게 지어준 시 「증조극휴(贈曺克休)」에서는 학문을 서로 권면하는 모습을 읊었고, 유해(兪諧)에게 지어준 시 「흠재유약불래 시이경지(欽哉有約不來, 詩以警之)」에서는 “겉만 화려한 습성을 버려라, 우정은 신의를 지키는데 달렸다.”라고 그에게 충고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가운데 책을 읽다가 졸자 지은 시 「독좌양진재간서 양구위수마소침 인서일절이자경(獨坐兩進齋看書 良久爲睡魔所侵 因書一絶 以自警)」에서는 자신을 재여(宰予)에게 비유하여, 힘써 배우고 실천하려는 마음과, 건강이 따르지 못해 안타까워하였다.
부(賦)의 「지방막여자수부(止謗莫如自修賦)」는 남의 비방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힘써 경계하고 조심하며, 쉬지 않고 성찰하는 신독(愼獨)에 중심을 두어 학문을 닦고 덕행을 쌓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불색불류부(不塞不流賦)」에는 불교를 저지하지 않으면 유도(儒道)가 유행하지 못한다고 지적, 중국 한유(韓愈)의 설을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논의 「제갈량살마속론(諸葛亮殺馬謖論)」은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일에 대한 논설이다. 마속은 제갈량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지만 상관의 명령을 어겼기에 사형을 처했다면서, 이는 공과 사를 구분한 것이라 말하고, 사소한 인정으로써 대의의 국법을 어길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잠의 「불괴옥루잠(不愧屋漏箴)」 또한 「지방막여자수부」처럼 신독의 공부에 중심을 두고, 성(誠)·경(敬)·신수(身修) 등에 관한 문구만을 골라 놓은 좌우명이다. 「속원조오잠」은 5편의 제목 외에 본문이 일실(逸失)되었으나 이를 통해 그가 이언적을 본받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잡저 중 「혼례질의(昏禮質疑)」는 혼례에 대하여 의심나는 것을 스승인 정구에게 질문한 문답이다. 「기축일록(己丑日錄)」은 1589년(선조 22)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을 배운 과정과 학문에 관하여 문답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묘지명은 대암(大菴) 박성(朴惺), 묘갈명은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지었다. 행장은 정종로(鄭宗魯)가 묘지명과 묘갈명에 의지하여 지었다. 가장은 아우 이의혼(李宜渾)이 지었다. 문견록(聞見錄)은 그의 효행에 대한 일화들을 모았는데, 스승인 정구와 판서를 역임한 달천(達川) 윤국형(尹國馨)의 구술, 그리고 읍지인 『동경지(東京志)』에서 인용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무첨당 이의윤의 수기(修己)적 학문 자세와 그의 효행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