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白潭) 조우신(趙又新)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읍(汝揖)이며, 아버지는 조상(趙相)이다. 8세에 이웃의 이여길(李汝佶)에게 배웠고, 20세 즈음 전식(全湜) · 정경세(鄭經世) · 이현영(李顯英)에게서 배웠다. 33세에 외조부가 지냈던 상주의 백담으로 이사하였다. 31세에 증광시(增廣試) 진사에 합격하여, 42세에 성균관에 기거하며 공부하였고, 66세에 식년 문과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홍호(洪鎬), 이식(李植), 조경(趙絅) 등과 교유하였다. 관직은 희릉 참봉(禧陵參奉),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를 역임하였다.
본집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홍상민(洪相民)이 1724년에 쓴 서문과 기년(紀年)이 실려 있다. 권미(卷尾)에는 조혜(趙𢞯)와 1807년경에 쓴 정종로(鄭宗魯)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詩)와 만(輓)이다. 시는 저자가 40세인 1622년 7월부터 죽기 전해인 1649년 9월까지의 작품이 연도별로 110제(題)가 수록되어 있다. 1622년 낙동강에서 적벽부를 재현하고 읊은 시에서는 함께 뱃놀이를 즐긴 25인의 명단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의 교유 관계를 알 수 있다. 「시비음(是非吟)」은 희학이 가미된 배체(俳體)로서 그 저변에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병자호란 때문에 태백산으로 피난 가서 모친의 상기(喪期)를 마쳤는데, 이 시기에는 주로 홍호와 왕래하며 머물렀던 수월암(水月菴), 숭정동(崇禎洞), 외징대(畏徵臺) 등에서 읊은 시가 있으며, 이후 희릉 참봉에 부임한 뒤 4릉(陵)의 참봉 이경(李敬), 신효(申孝), 황희(黃禧), 이창(李昌)과 함께 1645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맞이하며 읊은 시가 있다. 이후에도 이 4릉 참봉들과 계속하여 시를 수창하였다. 만(輓)은 신즙(申楫), 유약증(兪若曾),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전제(全湜) 등 26명에 대한 것이다. 이 밖에도 신준(申准), 김효성(金孝誠) 등이 주요 수창자이며, 택당(澤堂) 이식(李植)에게 준 장편의 시가 있다.
권2는 제문(祭文) 14편으로, 이준(李埈), 전제(全湜), 유진(柳袗)에 대한 것 외에 저자가 66세에 문과에 합격한 뒤 어버이의 무덤에 올리는 영전문(榮奠文), 백씨(伯氏)와 요절한 세 아우에 대한 것 등이다.
권3은 부(賦), 소(疏), 정문(呈文), 서(序), 상량문(上樑文)이다. 부는 곡신자(谷神子)라는 가상의 인물과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는 일화에 대해 논의하여 노자를 우위에 두어야 할 것을 주장한 곡신자를 반박하는 내용인 「문례어노자(問禮於老子)」 외 2편이 있다. 소는 광해군의 난정(亂政)과 이이첨(李爾瞻)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청참삼간소(請斬三奸疏)」,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촌의 실상과 당시 토지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논양전소(論量田疏)」 등이 있다. 정문(呈文)은 저자가 희릉 참봉이 되어 능침 수호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수복(守僕)을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키지 말 것을 경기 감사 김남중(金南重)에게 청하는 「상기백김남중문(上畿伯金南重文)」, 서는 성절사(聖節使)로 가는 전식(全湜)을 전송하는 「송좌승지사서전공조천서(送左承旨沙西全公朝天序)」 내용이고, 상량문은 종가의 침실 상량문이다.
권4는 부록으로, 전극염(全克恬) 등이 지은 만사(輓詞) 9편, 홍여하(洪汝河) 등이 지은 제문 4편, 사위 홍빙(洪凭)이 지은 가장(家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묘갈문, 채헌징(蔡獻徵)이 지은 행장이 실려 있다. 특히 홍여하(洪汝河)는 그의 제문에서 “행동은 개결하고 방정하며, 학문은 순수하고 넉넉하다〔行介而方 學純而優〕.”라고 평가하였다.
『백담유집(白潭遺集)』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유학자인 조우신의 효행과 교유, 그리고 그가 어떻게 현실 정치에 이바지하려 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