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白源) 신석번(申碩蕃, 1596년(선조 29)∼1675년(숙종 1))의 자는 중연(仲衍),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상주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신응암(申應麟)이고,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郎) 신근(申謹)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젊어서 송교(松郊) 이목(李楘)에게 수업하다가, 나중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지만, 영남의 논의에 따르지 않고, 송시열 등 서인계 인물들과 교류하였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에 제수되었고, 또 두 번이나 대관(臺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41년(인조 19) 8월 송시열의 천거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한 달포 만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1646년(인조 24) 다시 유일로 천거되어, 6품의 형조(刑曹)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1653년(효종 4)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천거하고 1668년(현종 9) 민정중(閔鼎重)과 조복양(趙復陽) 등이 대간(臺諫)에 의망하기를 청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63년(현종 4) 강원도 상운(祥雲) 찰방(察訪)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풍악산과 오대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고, 1668년(현종 9)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가 되었다. 같은 해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이 되고 1670년(현종 11)과 1672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1674년 8월 현종(顯宗)이 승하하고,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였으나, 숙종이 막 즉위하여 내린 명이었으므로 감히 집에 앉아 사양할 수 없어 병을 참고 나가서 문경현(聞慶縣)에 이르러 상소를 올려서, 고향 상주로 돌아가서 뼈를 묻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백성들이 겪는 병폐를 개진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1675년(숙종 1) 1월 21일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경세와 이준의 문인이었던 신석번은 병자호란으로 청과의 화의가 성립하자 과거에 대한 뜻을 접은 후 여러 차례의 천거를 모두 거절한 채 은거했다. 특히 2차 예송(禮訟) 당시인 1666년 경상도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이 조정에 의례소(議禮疏)를 올리며 송시렬의 기년복 논의를 반박하자 이를 비판하며 송시열의 기년복 논의를 지지했다. 경상도 상주 지방에 살면서 영남학파의 의논에 얽매이지 않고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을 흠모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경학(經學)에 밝았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자의 시문은 아들 신관(申爟)에 의해 처음 수집, 편찬이 시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관은 가장을 지어 송시열에게 묘지(墓誌)를 부탁하여 받았고, 1696년경에는 윤증(尹拯)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여 받았다.
이후 1755년(영조 31)경 후손 신진홍(申鎭鴻)이 다시 가장(家藏) 초고(草稿)를 바탕으로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편차하고 신경(申暻)의 고증(考證)과 간초(揀抄)를 거쳐 정고본(定稿本)을 만들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역시 간행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1845년(헌종 11)년경에 가서야 저자의 7대손 신덕규(申德圭)가 위의 정고본을 바탕으로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는데, 6권 3책의 목활자본이었다. 신덕규는 송준길(宋浚吉)의 후손 송내희(宋來熙)에게 묘표(墓表)를 부탁하는가 하면 이전에 송시열이 지은 묘지 등을 엮어 부록을 만들었다. 신덕규는 맨 앞에 홍직필(洪直弼)에게 받은 서문을, 맨 뒤에 신경(申暻)과 송달수(宋達洙)가 지은 발문을 싣고, 시문과 부록 합 6권 3책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이후의 중간(重刊)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6권 3책이다. 권두에 홍직필(洪直弼)의 서문과 권말에 신경(申暻) · 송달수(宋達洙)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詩)로, 오언 절구와 오언 율시, 칠언 율시를 합쳐 120제(題)이고 뒤에 만시(挽詩) 74제(題)를 따로 모아 편차하였다. 시는 증시(贈詩), 차운시(次韻詩), 송시(送詩)가 대부분이다. 금강산을 유람할 때 지은 「제만폭동(題萬瀑洞)」이 있고, 상주(尙州)에 우거하면서 낙동강과 관련하여 지은 「유낙강(遊洛江)」, 「추일도낙강(秋日到洛上)」, 「등낙동관수루(登洛東觀水樓)」 등이 있으며, 이만영(李晚榮), 김준민(金俊民), 이원규(李元圭), 김도(金濤), 이익(李翼), 정휴길(鄭休吉) 등과 나눈 시가 많다. 만시는 효종대왕(孝宗大王), 이준(李埈) 등에 관한 것이다.
권2는 소(疏) 5편과 서(書) 33편이고, 권3~4도 서(書)이다. 상소 중 1666년(현종 7)에 올린 「변송시열피무소(辨宋時烈被誣疏)」는 일부 잔결(殘缺)되었지만 대강은 송시열의 자의대비(慈懿大妃) 기년복설(朞年服說)을 지지하는 상소이다. 1674년(현종 15)에 올린 「사장령소(辭掌令疏)」에서는 장령을 사양하면서 연이은 흉년과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의 폐단을 극언하였다. 편지는 191편으로, 이만영, 김도, 정두경, 송시열, 송준길, 조복양, 윤선거, 민유중, 김석주, 윤증 등과 시사와 당면한 정치 문제를 논한 편지들을 인물별로 모아 놓았다.
권5는 잡저(雜著) 3편, 서(序) 1편, 발(跋) 1편, 고문(告文) 4편, 제문(祭文) 9편, 묘지(墓誌) 2편, 묘갈(墓碣) 2편이다. 잡저 3편은 보은(報恩) 유생을 대신하여 효자 이사언(李思顏)의 정려(旌閭)를 청하며 지은 「정예조문(呈禮曹文)」, 향소(鄕所)를 대신하여 이후홍(李后洚)의 개장을 호소한 「通一鄕文」, 선롱(先壟)의 나무를 함부로 베지 말도록 하자는 「문중완의(門中完議)」이다. 제문은 김도, 김진후(金振後), 성여송(成汝松) 등에 관한 것이다. 묘지는 조일(趙鎰)과 신진일(申震逸), 묘갈은 성여송과 김종선(金宗善)에 관한 것이다.
권6은 부록이다. 묘지는 송시열이 썼고, 묘표는 송준길의 후손 송래희(宋來熙)가 썼다. 연주는 1668년(현종 9) 조복양과 민정중이 진선(進善)으로 저자를 천거하였을 때, 1682년(숙종 8) 김석주의 건의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을 때의 기록이다. 만사는 문생(門生) 채석징(蔡錫徵), 황상중(黃尙中) 등이 지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노론(老論)이 중앙 정국을 장악함에 따라 영남 내 노론으로 학연과 당파를 전향하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들 영남 노론의 추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