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문집 ()

유교
문헌
조선 전기, 문신 · 학자 구봉령의 시 · 서(書) · 제문 · 전 등을 수록한 시문집.
이칭
이칭
백담집
문헌/고서
편찬 시기
1615년
간행 시기
원집: 1645년(인조 23), 속집: 1811년(순조 11)
저자
구봉령(具鳳齡)
편자
이준(李埈)
편저자
이준(李埈)
권책수
원집 10권 4책, 속집 4권 2책
권수제
백담선생집(栢潭先生集), 백담선생속집(栢潭先生續集)
판본
목판본
표제
백담집(栢潭集)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충남대학교 도서관, 안동대학교 도서관, 경기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백담문집』은 조선 중기 문인이자 학자인 구봉령의 시문을 편집한 문집이다. 그는 퇴계학파에서 학문적으로 한 축을 담당한 유학자로서 시들은 그가 외직을 지내면서 지방의 풍경을 보고 읊은 내용이 대부분이고, 상소는 주로 임금의 수신과 기강의 진작을 장려하는 내용이다. 편지는 조정 상황과 당론 타파부터 학문의 방법까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그의 사후 손자 사위 위준이 편집하고, 이후 풍기 군수 김계광이 원집을 안동 유생 이유수 등이 속집을 각각 간행하였다.

정의
조선 전기, 문신 · 학자 구봉령의 시 · 서(書) · 제문 · 전 등을 수록한 시문집.
저자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은 자가 경서(景瑞), 본관은 능성(綾城),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유년 시절 양친을 여의고서 외조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때 외종조인 권팽로(權彭老)와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중부(仲父)인 정이흥(鄭以興)에게서 수학하였다. 35세인 1560년(명종 15)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1564년 정시 장원을, 1566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0년(선조 3) 8월에는 치사(致仕)의 뜻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 퇴계를 뵈었다. 이후 백담은 조정과 산수를 오가며 삶을 이어 갔다. 1573년 6월에는 직제학(直提學)에 오르고 8월에는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51세인 1576년에는 백담에 용산서당(龍山書堂)을 완성하여 이후 간혹 고향에 있을 때는 서당에서 그의 문인인 권춘란(權春蘭), 안제(安霽), 정사성(鄭士誠), 정사신(鄭士信), 권우(權宇) 등과 강학하였다.

구봉령이 벼슬했던 시기는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의 대립으로 인해 조정의 사림(士林)이 분열될 때였다. 그는 중립을 견지하여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으며, 당색을 떠나 소신껏 인재를 등용하는 꿋꿋한 지조를 보였다. 그럼에도 백담은 사론의 분열이 가져오는 폐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붕당이 형성된 원인을 두고 심의겸(沈義謙)의 파직을 논하면서 심의겸과 함께했던 인물들을 거론하였는데, 이때 앙금을 가지고 있던 이발(李潑)이 그를 심의겸의 문객으로 지목하였다. 구봉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체 조정에 올라가지 않았으며 병환이 깊어지면서 이듬해 1586년(선조 19) 사망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본집의 편찬 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615년(광해군 7)에 저자의 손자 사위 이준(李埈)이 원집(原集)과 별집(別集)으로 간행할 계획으로 편집하였는데 시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후 원집은 1645년(인조 23) 풍기(豊基) 군수 김계광(金啓光)이 10권 4책의 목판으로 편집, 간행한 뒤 1692년 이준이 쓴 행장(行狀)과 묘갈명 등을 부록으로 추가하였다. 별집은 1811년(순조 11) 안동 유생 이유수(李裕垂) 등이 정리하고 김굉(金㙆)이 교정하여 4권 2책으로 간행하여, 총 14권 6책이다.

구성과 내용

『백담집』은 원집 10권 4책과 속집 4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수에는 홍여하(洪汝河)의 서문이 있고, 그 다음 세계도와 연보 그리고 연보 부록으로 치제문(致祭文), 유성룡(柳成龍) 등의 제문(祭文), 이산해(李山海), 정탁(鄭琢), 홍성민(洪聖民), 유성룡 등의 만장, 권춘란(權春蘭)의 봉안문이 이어져 있다.

원집의 권1에는 오언절구 49수, 칠언절구 167수, 권2에는 칠언절구 130수, 권3에는 오언율시 58수, 권4에는 칠언율시 194수, 권5에는 오언배율 3수, 오언고시 12수, 칠언배율 7수, 칠언고시 9수, 부 1수가 각각 실려 있다. 권6~7에는 소(疏) 2, 차(箚) 1, 계(啓) 1, 의(議) 2, 교서(敎書) 1, 비답(批答) 1, 책문(冊文) 1, 청사(靑詞) 3, 축문(祝文) 2, 제문(祭文) 4, 전(箋) 6, 표(表) 1편이 각각 실려 있고, 권8에는 서(書) 90편이 실려 있다. 권9에는 기(記) 1, 설(說) 1, 논(論) 3, 제문(祭文) 19, 묘갈(墓碣) 3, 묘표(墓表) 1편이 각각 실려 있고, 권10에는 「상례문답(喪禮問答)」과 「유어(遺語)」, 그리고 부록으로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사액 제문(賜額祭文) 등이 실려 있다.

원집 권1~5의 시에는 자주(自註)와 편자주(編者註)가 자세히 실려 있다. 구봉령은 황해도(黃海道),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의 재상 어사(災傷御史)를 역임한 바 있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그때마다 지은 시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때의 시는 산수 경물을 보고 느낀 점을 읊은 산수 경물시와 자신의 처지를 읊은 술회시가 대부분이다. 또 퇴계 선생을 존모하여 차운하거나 퇴계 선생의 상징적 공간인 청량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남기고 있으며, 유성룡(柳成龍), 조목(趙穆) 등 사우들과 차운하고 화답한 시가 다수 들어 있다. 「대음희성부(大音希聲賦)」는 옛 황제들이 여러 음(音)의 제도를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고 습속을 바르게 하기 위해 힘썼으며, 그 중에도 황제들의 숨은 뜻인 대음(大音)은 다른 소리와 다르게 들리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움직여 백성을 선하게 하니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교화의 효과는 어느 것보다도 크다는 내용이다.

권6의 「의홍문관진폐소(擬弘文館陳弊疏)」에서는 당시 지진, 일식, 충요(蟲妖) 등 재앙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은 임금이 매사를 공경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며 궁중의 비위를 금하고 유신을 애용해야 한다는 등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권7의 「사헌부차자(司憲府箚子)」는 1572년 구봉령이 사헌부(司憲府)에 재직할 때 올린 차자(箚子)이다. 선조가 등극한 지 5년에 치효(治效)가 드러나지 않고 재앙이 날로 성하여져 천재지이와 해충이 전에 없이 치성하니 전하께서는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쓸 것을 진달한 내용이다.

권8은 90편의 편지로, 유성룡(柳成龍), 조목(趙穆), 남치리(南致利), 권춘란(權春蘭) 및 아들 구충윤(具忠胤)과 구선윤(具善胤), 구성윤(具誠胤) 등과 주고받았다. 유성룡과의 편지에는 조정 상황과 당론 타파에 대한 내용이 많고 조목(趙穆)과 권춘란(權春蘭)과의 편지에는 학문의 입지(立志), 수신(修身), 계구(戒懼), 신독(愼獨)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남치리에게 보낸 편지에는 상례(喪禮)에 대한 문답으로 상(喪), 연제(練祭), 담사(禫祀), 길제(吉祭) 등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

권9의 「혼천의기(渾天儀記)」는 천문을 관측하는 데 쓰는 혼천의의 모양과 만들게 된 동기 등을 말한 것이다. 논(論)은 성인의 도를 구해서 보려면 맹자의 마음에서 시작해야 된다는 「구관성인지도필자맹자시(求觀聖人之道必自孟子始)」, 『주례』에도 여자 무당의 말이 있다는 「주례설여무론(周禮設女巫論)」, 제갈공명이 죽지 않고 소열(昭烈)을 보필하여 공업을 이루었다면 예악(禮樂)이 흥하였을 것이라는 선유(先儒)의 의견에 대해 논변한 「공명서기예악론(孔明庶幾禮樂論)」이 있다.

권10의 「상례문답(喪禮問答)」은 여러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 상례의 불분명한 점을 설명하면서, 특히 적자(嫡子)와 서자의 복제의 구분, 스승의 복제 등에 대한 9개의 문답을 정리한 것이다. 「유어(遺語)」는 어록을 모은 것이다. 부록에는 이준이 지은 행장, 묘갈명과 1692년의 사액제문이 실려 있다.

속집은 권수(卷首)에 김굉(金㙆)의 속집 서문이 있고, 권1~3에는 시, 권4에는 부(賦) 1, 사(辭) 1, 서(書) 45, 명(銘) 1, 찬(贊) 1, 축문(祝文) 4, 제문(祭文) 9편이 실려 있으며, 부록으로 만사(輓詞), 제문, 시장(諡狀), 「청증작사시서원사액소(請贈爵賜諡書院賜額疏)」, 「예조회계(禮曹回啓)」 등이 실려 있다.

속집의 권1~3의 시는 원집과 마찬가지로 시체별(詩體別)로 실려 있고, 황해도 · 충청도 · 전라도 세 도의 재상 어사, 충청도와 전라도 두 도의 관찰사 시절 지은 시가 다수이다. 권1의 오언고시 중에는 사서(史書)를 읽고 감흥을 적은 시와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읽고 쓴 시가 실려 있으며, 권2의 칠언절구 가운데는 현감 홍가신(洪可臣)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부여(扶餘)를 향해 가면서 유람하고 지은 시 14수와 「빈일헌십영차운(賓日軒十詠次韻)」이 실려 있다.

속집 권4의 「치군불급요순부(耻君不及堯舜賦)」는 당우 삼대(唐虞三代)의 미덕을 칭송하고 임금이 요순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남에게 책임을 미루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내용이다. 「금강사(錦江辭)」는 1568년(선조 1) 전라도 재상 어사(災傷御使)로 갈 때 배를 타고 금강을 지나다가 흥이 일어 지은 부(賦)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찬탄하고 지난 세월에 대한 감흥과 선현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소망을 피력하였다.

서(書)에서 퇴계 선생께 올린 문목 2편은 납폐(納幣)의 예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다. 나머지는 조목(趙穆), 권춘란(權春蘭) 등에게 보낸 편지 43편이 실려 있다. 그 외 「옥주명(玉舟銘)」, 「경성찬(景星贊)」, 축문, 제문이 실려 있으며, 부록에는 정탁(鄭琢), 권춘란, 이봉춘(李逢春), 조목, 권호문(權好文) 등이 지은 만사와 이서우(李瑞雨)가 지은 시장(諡狀) 등이 들어 있다.

평가와 의의

구봉령은 퇴계학파에서 학문적으로 한 축을 담당한 유학자이며, 당론의 타파와 서론의 보합에 애쓴 관료이며 1,100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다. 『백담문집』을 통해 조선 중기 유학과 조정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으며, 문장가로서의 구봉령의 위상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한국문집총간 해제 백담집』
『국역 백담집』

논문

박동일, 「백담 구봉령의 한시 연구」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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