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표(吳剛杓)의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무이재(無貳齋)이다. 그의 집안은 선조 오응서(吳應瑞)가 자신의 스승이었던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이 사사(賜死)된 사건을 계기로 줄곧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증조 오재의(吳在義), 조부 오명호(吳明鎬), 부친 오치국(吳治國)도 관직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그도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한 채 전형적인 선비의 삶을 영위했던 가풍을 이어받았다. 오강표는 약관의 나이에 부친의 명에 따라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에게 수학하고자 하였으나 전재의 권고로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문하로 들어가서 학업을 마쳤다. 그는 스승 전우처럼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도학적 전통을 고수하는 데 힘썼지만 을사조약 때 전우처럼 은둔의 길이 아닌 공주 명륜당에서 자결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로써 미뤄볼 때, 오강표는 자신의 학문 속에서 충의의 참뜻을 충분히 체득한 지사(志士)형의 인물로 평가할 만하다.
2권 1책. 석인본. 1970년 김영택(金榮澤)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국한문 혼용체로 썼다. 서문은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용재(庸齋) 정헌태(鄭憲泰)가 발문은 긍암(兢菴) 김연뢰(金淵雷) 등이 썼다.
권수에 목록이 있고, 권1에 소(疏) 1편, 진정서(陳情書) 1편, 고문(告文) 3편, 시 68수이다. 권2는 부록으로 고산임선생친필(鼓山任先生親筆)·간재선생친필(艮齋先生親筆)·간재선생서(艮齋先生書)· 만사(輓詞)· 제문(祭文)·순국후사우찬술(殉國後士友贊述)· 행장(行狀)· 묘지(墓誌)·묘갈명· 전(傳)·제행장후(題行狀後)·기념식수추도문·순절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에 상소 「청참조인제적소(請斬調印諸賊疏)」는 1905년 을사오적을 민족 자존의 대의로서 참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상소문으로, 강개(慷慨)한 뜻이 글 전편에 흐르고 있다. 진정서는 도백(道伯: 관찰사)에게 위의 상소문을 조정에 올려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고문에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하기에 앞서 아버지의 묘소에 고하는 「고결선고묘문(告訣先考墓文)」, 스승인 임헌회(任憲晦)의 사당에 고하는 「고결전재임선생묘문(告訣全齋任先生廟文)」, 우리나라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경고동포문(警告同胞文)」이다. 상소와 고문에는 모두 일제의 국권 강탈을 막아내지 못한 뼈저린 반성과 동시에 일본의 노예로 굴복하면서 살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시는 「즉경(卽景)」, 「즉사(卽事)」, 「추망(秋望)」 등 처사를 자임하며 일상의 모습을 읊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금성(錦城), 조령(鳥嶺), 무량사(無量寺), 철령(鐵嶺) 등을 여행한 감흥을 읊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을사조약이 있던 1905년 11월에 지은 「탄음(歎吟)」에서는 중국 제나라의 충신 노중련(魯仲連)의 고절(高節)을 찬미하였으며, 속국의 백성이 살 곳이 어디냐고 비장한 뜻을 나타내었다.
권2 부록에는 그의 사후 호서, 호남 지역 문인들과 그 외 지역 인사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의 글들을 모았다. 첫 머리의 「간재선생서(艮齋先生書)」는 1905년 을사늑약 때 아편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이후 스승 전우가 보낸 편지로 자결은 인(仁)을 해치고 불효를 하니 만류하는 내용이다.
만사는 그의 절의를 칭송한 내용으로 간재 전우, 동문인 송암(松菴) 최종화(崔鍾和), 이석범(李奭凡), 김진응(金鎭應), 이용규(李龍珪), 최원(崔愿), 송병화(宋炳華), 송의섭(宋毅燮), 친족 오종건(吳鍾建), 오순표(吳純杓), 오달표(吳達杓), 오봉현(吳鳳鉉), 신보균(申普均), 찬정(贊政)을 지낸 구영조(具永祖), 애국지사 경암(敬庵) 곽한소(郭漢紹),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 등이 지었다. 제문은 동문 최종화를 비롯하여 백범(白凡) 김구(金九)도 지었다. 내용은 살신성인의 표상으로서 인의를 실천하여 포의로 절의를 밝힌 공을 드러내었다. 그 외에 송병화가 지은 묘갈명, 윤기선(尹岐善) 등이 지은 전, 김영학(金永學) 등이 지은 제후행장이 실려 있다.
무이재 오강표의 절의와 그의 순국을 기린 여러 글들을 통해 경술국치 때 조선의 유학자들이 어떻게 현실에 대응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