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은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1234년에 편찬한 수양서이다. 사서삼경과 『예기』 악기편에서 뽑은 29장의 경전 내용과 주돈이·정이·주희 등의 글 7편이 실려 있고, 여기에 진덕수가 송나라 유학자들의 논의들을 붙여서 주석으로 삼고 자신의 「심경찬」 1편을 덧붙였다. 우리나라에는 중종말 명종초에 김안국에 의해 전해졌는데, 이후 이황이 특히 중요시하였다. 이황은 초학자가 공부하는 자리에서 이보다 더 절실한 책은 없다고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황 외에도 이에 관한 저술을 남긴 유학자가 많다.
수록된 내용은 먼저 경전에서 뽑은 것으로 『서경』(1장) · 『시경』(2장) · 『역경』(5장) · 『논어』(2장) · 『중용』(2장) · 『대학』(2장) · 『예기』 악기(樂記)편(3장) · 『맹자』(12장)의 29장이 실려 있고, 다음에 송나라 도학자들의 글로는 주돈이(周敦頤)의 「양심설(養心說)」과 『통서(通書)』 · 「성가학장(聖可學章)」,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범준(范浚)의 「심잠(心箴)」,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 · 「구방심재잠(求放心齋箴)」 · 「존덕성재잠(尊德性齋箴)」으로 7편이 실려 있다. 진덕수는 이 명문들에 송나라 유학자들의 논의들을 붙여서 주석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심경찬(心經贊)」 1편을 덧붙였다.
1234년 안약우(顔若愚)가 천주부학(泉州府學)에서 간행하면서 발문을 실었다. 이 발문에서 진덕수가 만년에 다시 천주의 수령이 되었을 때 이 책을 편집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1242년 조시체(趙時棣)가 진덕수의 『심경』과 『정경(政經)』을 합쳐서 간행하였으며, 이 합간본에는 진덕수의 문인 왕매(王邁)의 서문이 실려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수록된 『심경법어(心經法語)』는 『심경』과 동일한 책의 다른 명칭이다. 첫 머리에 『서경』 대우모(大禹謨) 편의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이 실려 있는데, 진덕수는 「심경찬」에서 인심도심장의 글, 곧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해준 16자의 말씀(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따르는 마음은 지극히 희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용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은 만세토록 전해오는 심학(心學 : 도학의 심성 수양 공부를 의미하며 양명학을 가리키는 ‘심학’과는 구별하여야 함.)의 근원임을 강조하였다.
명나라의 정민정(程敏政)은 『심경』에 붙인 주석서인 『심경부주(心經附註)』 서문에서 『심경』에 실린 주석 가운데 진덕수의 『독서기』를 인용한 점을 유의하여 주석이 진덕수의 편집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뒷 사람들이 첨가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정민정은 또한 이 서문에서 사람이 사람된 것은 본심(本心)을 잃지 않는 것일 뿐이며, 성학(聖學)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요령은 경(敬)에 있다 하여 ‘심(心)’과 ‘경(敬)’을 『심경』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심경부주』에는 한 편의 발문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정민정은 『심경』과 『정경』의 합간본이 통용되면서 마음(『심경』)을 본체로 삼고 정치(『정경』)를 응용으로 삼았다 하여, 체용론으로 보려는 입장을 비판한다. 곧, 마음은 그 자체에서 본체와 응용이 갖추어져 있는 만큼 『정경』과는 관계없이 『심경』이 독립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책 끝에 정민정의 문인 왕조(王祚)의 발문이 있어서 『심경부주』의 저작 경위와 효용을 기록하고 있다.
『심경』은 우리 나라에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 명종 초에 김안국(金安國)이 이를 존숭하여 그의 문인 허충길(許忠吉)에게 전수한 데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심경』을 가장 중요시한 학자는 이황(李滉)이다. 이황은 젊어서 이 책을 서울에서 구해보고 깊이 연구한 뒤에, “나는 『심경』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믿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알았고, 이 책을 공경하기를 엄한 아버지같이 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의 기록에 따르면, 1561년(명종 16) 겨울 스승 이황을 모시고 있을 때 이황은 새벽마다 『심경부주』를 한 차례 독송하였다 한다.
이황은 1566년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어서 『심경』의 비중을 사서와 『근사록』에 못지 않게 존숭함을 밝히고, 정민정의 『심경부주』와 관련, 작자인 정민정의 인물됨에 관한 논난을 변론하고 『심경부주』의 내용에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이 섞여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변론하였다. 여기에서 이황은 명나라의 진건(陳建)이 정민정의 학풍에 주희와 육구연의 입장을 뒤섞으려는 태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적어도 『심경부주』는 도학의 정통성에서 문제가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황의 제자 황준량(黃俊良)은 “진덕수는 실상이 없고, 범준은 절실하지 못하며, 황간(黃幹 : 주자의 제자)의 소견은 두 사람보다 더욱 떨어지고, 정민정은 식견이 밝지 못하고 채택이 정밀하지 못하다”라 하여 『심경』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이황은 적극적으로 변론하였다. 이황은 『소학』 · 『근사록』 · 『심경』 가운데 초학자가 처음 공부하는 자리에서는 『심경』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만년까지 『심경』을 강의하여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까지도 계속하였다.
1794년(정조 18) 왕은 권벌(權橃)의 『근사록』 수진본(袖珍本)이 전해진 것을 보고 채제공(蔡濟恭)으로 하여금 어제(御製) 서문을 짓게 하면서, 전날 즉위하기 전에 보았던 이황이 직접 교정한 『심경』 수진본을 들어 말하였다. 여기에서 정조는 이 두 수진본의 사실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이 두 책은 겉과 속의 관계나 수레의 두 바퀴 또는 새의 두 날개처럼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모각(模刻)한 『심경』은 『심경부주』로서 「어제근사록서(御製近思錄序)」와 정조의 연설(筵說)을 첫 머리에 싣고 있으며, 본문 바로 앞에 원나라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心學圖)」와 「심학도설(心學圖說)」을 싣고 있다. 정복심은 이 「심학도」에서 심(心)을 한 몸의 주재라 하고, 경(敬)을 한 마음의 주재라 하여, 두 개의 중심 개념으로 제시하며, 『심경』의 전체 정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지은 『심경』에 관한 저술은 9종이나 된다. 곧, 이덕홍(李德弘)의 『심경질의(心經質疑)』(1권), 조호익(曺好益)의 『심경질의』(1권), 이함형(李咸亨)의 『심경표제(心經標題)』(2권) · 『심경질의부주(心經質疑附註)』(1권), 이황의 『심경석의(心經釋義)』(1권) ·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2권), 정구(鄭逑)의 『심경발휘(心經發揮)』(2권), 박세채(朴世采)의 『심경요해(心經要解)』(2권), 주세붕(周世鵬)의 『심경심학도(心經心學圖)』1권)이다. 여기에서 이덕홍 · 조호익 · 이함형 · 정구는 이황의 제자다. 따라서 9종 중에서 7종이 이황과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황의 『심경』에 대한 존숭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심경』에 관한 조선 후기 도학자들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많은 저술이 남아 있다. 조목(趙穆)의 「심경품질(心經稟質)」, 이만부(李萬敷)의 「심경속설(心經續說)」, 이원조(李源祚)의 「심경강의(心經講義)」, 김병종(金秉宗)의 『성학속도』 · 「제9심경찬도(第九心經贊圖)」 등 영남학파의 저술뿐만 아니라, 한원진(韓元震)의 「심경부주차의(心經附註箚義)」, 정호(鄭澔)의 「심경편말오씨설후변(心經篇末吳氏說後辨)」, 이항로(李恒老)의 「심경부주기의(心經附註記疑)」 등 기호학파의 저술도 상당수 있다.
또한,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 『심경밀험(心經密驗)』(1권)을 저술하여 『소학』이 밖을 다스리는 데 비하여 『심경』은 속을 다스리는 것으로 대응시키며 자신이 경전을 연구한 것을 『심경』으로 귀결시키겠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저술에서 자신의 심성론적 견해에 따라 주자학의 심성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양명학자인 정제두(鄭齊斗)가 『심경집의(心經集義)』(2권)를 저술하여 주자학과 육왕학(陸王學)을 통합하는 체계를 시도하였다. 그는 정민정의 『심경부주』를 모방하면서 그의 체계가 주자학에 기울어져, 지루하고 번잡함을 극복하려 한다는 양명학적 입장의 『심경』을 제시한 것이다. 최근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합쳐서 영인한 판이 두 종류나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