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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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적
1748년(영조 24)에 세워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안산(鞍山)에 있는 사찰.
유적/건물
건립 시기
1748년(영조 24)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봉원사는 1748년(영조 24)에 세워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안산(鞍山)에 있는 사찰이다. 1748년(영조)가 현재의 자리에 절을 짓고 봉원사라고 사액하며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무덤인 의소묘의 원당으로 삼았고, 이후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무덤인 수경원(綏慶園)의 원당(願堂)이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인 효창묘(孝昌墓)의 조포사(造泡寺)가 되었다. 조선 후기 봉원사는 왕실 원당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본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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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48년(영조 24)에 세워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안산(鞍山)에 있는 사찰.
내용

한국불교태고종의 본산(本山)이다. 889년(진성여왕 3)에 국사 도선(道詵)이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喜捨)받아 절을 창건하고 반야암이 봉원사의 전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태고 보우가 중건하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396년(태조 5)에는 이 절에 왕의 초상화를 모시면서 왕실의 원찰이 되어 번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하였고, 1651년(효종 2)에 다시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되었지만 극령(克齡) · 휴암(休巖) · 도암(道庵) 등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봉원사가 현재 위치에 자리잡고 봉원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영조 때의 일이다. 1748년(영조 24년) 영조가 절을 지을 땅을 하사한 곳에 찬즙(贊汁) · 증암(增巖) 등이 사찰을 새로 지었고, 이듬해 영조가 봉원사라는 현판(懸板)을 내려 이때부터 봉원사라 불렀다. 이때부터 봉원사는 왕실의 원당이 되었으며, 1752년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이 사망하자 봉원사를 의소묘(懿昭墓)의 원당으로 삼고, '의소재각(懿昭齋閣)'이라는 현판도 영조가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이후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무덤인 수경원(綏慶園)이 조성되면서 수경원의 원당(願堂)이 되었고, 1786년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정조는 봉원사를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묘(孝昌墓)의 조포사(造泡寺)로 삼는 등 18세기 왕실의 원(園), 묘(墓)를 관리하는 사찰이었다. 이 시기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고,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는 원당이자 조포사로 지정되며 봉원사의 사격(寺格)은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1788년(정조 12)에는 정조가 전국적으로 규정소(糾正所)를 설치하여 승려의 승풍(僧風)을 지도, 단속하게 하였는데, 경기도에는 다섯 곳의 규정소를 두었다. 이때 봉원사에는 공원소(公員所)를 두어 규정소의 업무를 돕게 하였다. 1864년에는 칠성각을 세웠고, 1884년(고종 21)에는 갑신정변의 주동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 · 서광범(徐光範) · 박영효(朴泳孝) 등이 이동인(李東仁)의 지도 아래 개화파의 젊은이들을 깨우쳐 정변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신축하였다. 1901년에는 고종황제의 후궁 엄비가 돌아가신 부모와 외가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위해 아미타괘불도를 제작하여 봉안하였는데 이 아미태괘불도는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이다. 1911년에는 다시 이보담(李寶潭)이 크게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가람(伽藍)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6년 최영월(崔映月)이 복원한 것이 많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을 위시하여 범종각 · 명부전 · 납골당 · 산신각 · 칠성각 · 종무소 · 비각 등이 있다. 중요한 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鄭道傳)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金正喜)의 청련시경(靑蓮詩境) · 산호벽루(珊瑚碧樓), 이완용(李完用)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등과 장승업(張承業)신선도 십폭병풍 등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67·69·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약 500년의 괴목(槐木)이 있고, 절 뒤에는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이 얽힌 관음바위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영조실록』
『청장관전서』

단행본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이고운, 박설산, 『명산고찰 따라』 (신문출판사, 1987)
이정, 『한국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전통사찰총서』 4-서울의 전통사찰- (사찰문화연구원, 1994)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논문

고승희, 「조선시대 순조-순종대 왕실발원 괘불화 연구」 (『동아시아불교문화』 49, 2014)
정진희, 「서울 봉원사 칠성각 「치성강여래도」 도상연구 - 새로운 치성광여래 도상의 창출」 (『서울과 역사』 1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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