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되었을 때에는 성불사(成佛寺)의 말사였다. 528년(법흥왕 15) 4월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흥사(興寺) 또는 흥풍사(興楓寺)라 하였다고 하나 창건연대 및 창건자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없다.
그 뒤 폐허화되었다가 조선 초기에 조반(趙胖)이 중창하여 속명사라 하였으며, 이때의 중창에 얽힌 설화가 전하여진다. 조반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세 번이나 쳤지만 베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이를 천명(天命)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조반은 귀국 도중에 황해도 서흥에서 숙박하였는데, 꿈에 3인의 승려가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오운산의 석불이다. 이번 명나라 황제가 그대의 머리를 베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들이 그대의 목숨을 대신하여 머리가 베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오운산 바위 밑에 있으니 떨어진 머리를 붙이고 절을 지어 달라.”라고 하면서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나 확인하여보니 사실이었으므로 왕에게 이 사실을 말하여 절을 짓고 부처의 머리를 붙여서 모신 뒤 목숨을 이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도 속명사로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다시 폐허화되었으나 1884년에 왕실의 시주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처례(金處禮)가 성불사를 읊은 시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