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년(성종 2) 봄에 덕종의 아내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주1가 절을 급하게 지어 주2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시부를 시켜 중창하게 했고 내수사에서 쌀과 베를 내어 경비를 후원했다. 2월에 시작하여 10월에 총 119칸의 중창 불사를 완료했는데, 노역에 삯을 주도록 하여 민인들이 앞다투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불사의 주관은 설준(雪峻)이 담당했는데 법당 중창부터 세부 절차까지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이 진행되었다. 단청의 아름다움이 뛰어나 세조의 능침사인 봉선사(奉先寺)와 그 아름다움이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1472년 4월 주3에 중창 불사의 완성을 기념하는 낙성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이때 오색구름이 일고 향기가 절 주위에 가득했으며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로 뻗쳤다. 인수대비는 사찰 운영을 위해 미곡 100섬을 시주했고, 성종도 교지를 내려 이 절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사찰의 역사와 구체적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조선 후기에는 유명무실한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00년에 월초 거연(月初巨淵, 1858~1934)이 고종과 황태자, 80여 명에 달하는 고위 관료의 후원을 받아서 정인사를 이어 수국사를 창건했다. 홍월초로 잘 알려진 거연은 봉선사 출신으로 서울 화계사(華溪寺)의 주지를 했고, 1902년 대한제국 사사관리서 체제에서 서울 부근 사찰을 총괄하는 내산섭리(內山攝理)를 지냈으며 1906년에 불교연구회의 초대 회장과 근대식 불교 교육 기관인 명진(明進) 학교의 교장을 맡은 주4이었다. 이후 어느 때인가 철원 보개산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1239년경에 조성된 목조 아미타불상이 이곳에 이안되었다. 1995년에는 법당 안팎을 금으로 개금한 황금보전이 건립되었고 경내에는 대웅전, 관음전, 주5 등이 있다.
조선 초에 덕종의 원찰 정인사로 창건된 이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기에 유명 학자들과 문필가들이 많이 찾아와서 글을 남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인지(鄭麟趾) · 최항(崔恒) · 서거정(徐居正) · 노사신(盧思愼) · 성임(成任) 등이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수국사 소장 목조 아미타불상은 불상뿐만 아니라 불복장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또 1907년에 일괄 조성된 아미타불도, 극락구품도 등 불화 6점(서울특별시 무형문화유산)과 1908년에 제작된 괘불화 등 7점의 불화가 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왕실 후원 불화의 호화로운 면모를 잘 보여주는데, 왕실에서 주6 태자와 태자비, 의친왕과 의친왕비, 영친왕 등의 안녕과 천수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