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구분론 ()

조선시대사
개념
역사 진행상 동질성이 강한 특정 시기를 앞뒤의 시기와 차별하여 파악하는 방식이나 이론.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시대구분론은 역사 진행상 동질성이 강한 특정 시기를 앞뒤의 시기와 차별하여 파악하는 방식이나 이론을 말한다. 다만, 어떤 잣대를 사용해 보는가에 따라 구분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 현재 국내외 학계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가장 큰 규모의 시대구분으로는 전근대(pre-modern), 근대(modern), 현대(contemporary)의 삼분법을 들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진화과정에서 근대가 매우 강력한 변화의 시대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사에서도 시대를 가장 크게 구분할 때 전근대와 근현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양분한다.

정의
역사 진행상 동질성이 강한 특정 시기를 앞뒤의 시기와 차별하여 파악하는 방식이나 이론.
개설

‘시대’라는 용어에는 크게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먼저 역사의 큰 전환기를 기준으로 유사한 성향이 지속하는 기간을 뜻한다. 예컨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의 구분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의 시대 중에서 시기를 세분할 때도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고려 전기나 조선 후기 등의 구분을 꼽을 수 있다. 이때 시대는 흔히 시기로 부른다. 마지막으로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협의의 의미로도 시대를, 특히 대(代)를 사용한다. 성종 대나 영 ‧ 정조 시대와 같은 구분이 그런 예이다.

시대를 영어로는 흔히 times, age(s), period, era, epoch 등으로 표현한다. 이들 용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역사학에서는 특별한 구분 없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고대(ancient times), 중세(medieval age), 근대(modern period)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듯이 ‘시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각기 다른데, 이런 차별적 사용에 어떤 특별한 학문적 의미는 없다. 아울러, ‘역사의 시대구분’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으로는 periodization in history, division of history 등이 일반적이다.

시대구분은 장구한 역사를 몇 개의 시대로 나누어 각 시대의 공통성과 전환기의 변화 및 시대별 차이를 이해하려는 필요로 등장하였다. 역사의 흐름은 끊임없는 연속이지만, 변화가 크게 발생한 시점을 기준으로 역사의 진행 동향을 특성화하여 파악하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물줄기의 속성이 크게 바뀔 때를 기준으로 강 전체를 상류, 중류, 하류 등으로 구분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듯 시대구분의 목적은 역사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파악하되, 각 시대의 특성을 추출하여 그 시대 상황과 성격을 전후 시대와 차별화하여 이해하고, 역사의 진화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시대구분의 방식은 역사 인식의 방법과 이론, 강조점, 개인의 역사관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시대구분에는 정답이 따로 없으며,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과 시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비록 주관적 구분이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시대구분의 주관적 기준 설정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입증 가능한 사실성을 두루 갖출 필요가 있다.

이른바 경험론적 개연성을 충분히 갖출수록, 다른 말로 근대 학문에서 중시하는 유형화와 일반화가 가능한 기준이자 이론일수록 시대구분 학설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적 기준은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무엇을 더 중시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예를 들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의 기본 분야에서 어느 것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시대구분의 결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

왕조 중심의 전통적 시대구분도 결국은 왕조라는 기준을 활용한 구분인데, 많은 사람이 그런 기준에 동의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만약 여성의 참정권을 기준으로 근대의 시작을 논하겠다면, 산업혁명을 근대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서구사회의 근대도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순차적으로 가능했다는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역사학자가 여성의 참정권 문제를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수긍하는가이다.

시대구분은 거시적 역사 인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미 한 번 시대구분을 거친 특정 시대사를 다룰 때도 그 시대 안에서 또 다른 세부적 시대구분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사 안의 시기 구분인 셈이다. 중세라는 시대사 연구에서 중세를 전기 ‧ 중기 ‧ 후기 등으로 세분한 예가 대표적이다. 고려 전기니 조선 초기니 하는 2차적 시대구분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주제[분야]사 서술에서도 나름의 시대구분이 별도로 필요하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의 주제별 시대구분은 역사 일반의 종합적 시대구분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으로 유교식 관료 체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정치적으로는 중세를 벗어난 것처럼 이해할 수도 있으나, 사회적으로 보면 반상(班常)과 양천(良賤) 등의 엄격한 사회신분제도가 엄연한 탓에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대구분의 백미는 시대의 특성을 추출하여 명명하는 일이다. 각 시대의 차별적 특성이 바로 시대의 명칭에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처럼 왕조의 이름으로 시대를 명명하는 것도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성격이나 제반 시스템상으로 차이[변화]가 엄연하기에 가능하다.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농노적 봉건사회, 근대 자본주의사회 등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명명한 시대 이름에도 각 시대의 사회경제적 특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처럼 현시점을 기준으로 단순히 시간상의 원근에 따라 명명한 시대 명칭도 있다. 하지만 역사학 전문용어로서의 고대 ‧ 중세 ‧ 근대 등의 용어는 그저 시간에 따른 구분만은 아니다. 국가의 통치구조나 사유체계 또는 사회경제적 지표 등 여러 분야에서 고대는 고대의 특성을, 중세는 중세의 특성을, 근대는 근대의 특성이 엄연하다.

한 예로, 유물사관을 신봉하는 학자들은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력의 성격을 기준으로 고대를 노예제사회로, 중세를 농노제사회로, 근대를 임금노동[자본주의]사회로 특화한다. 사유체계로 보아도 고대와 중세는 대체로 신(神) 또는 보편적 절대가치를 신봉하며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에 비해, 근대는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 경험론적 논증을 중시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상이 분명하다.

국가의 성격으로 보아도 중세까지는 국왕을 정점으로 사제를 포함한 귀족층이 주도하는 신정(神政)적 왕조 국가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근대는 일반 평민의 정치참여 권리를 제도적 개혁을 통해 점차 확대하고, 신분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정 형태의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추세가 두드러진다.

요컨대, 고대나 중세나 근대는 단순히 시간상의 원근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근대의 통념적 요소를 어느 정도 제대로 갖춰야 근대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중동의 여러 나라는 시간상으로는 21세기 현대를 영위하는 부유한 국가일지라도, 정치 ‧ 사상 ‧ 종교 측면에서 보면 아직도 중세사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직 근대조차 도래하지 않은 셈이다. 이는 현재 북한의 현실도 별로 다를 바 없다. ‘김씨왕조’라는 말이 회자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시대적 특성 문제 때문이다.

근대화의 출발 시점이 나라마다 다르듯이, 종합적 의미로 근대사회로 들어선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1876년 개항을 기준으로 한국사를 전근대와 근대로 구분하는 방식이 매우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대구분은 동아시아 국제질서 패러다임의 근원적 변화라는 기준을 중시한 결과일 뿐이다. 개항했다고 해서 조선 사회가 곧바로 근대로 진입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렇듯 한 나라의 역사에서도 시대구분은 분야[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이를 좀 더 역사적 배경에 중점을 두어 보면, 고대와 중세의 분리에는 인본적(人本的) 고전 문화인지 신본적(神本的) ‘암흑기’인지에 더하여 종족의 대이동과 전쟁에 따른 제국 패러다임의 변화 등이 주요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중세와 근세의 차별화에서도 르네상스 같은 인문적(人文的) 기준과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이라는 패권 지형도의 변화 등이 분리의 기준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중세’를 탈피한 르네상스부터 모던(modern)으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왕성하였다. 이때의 근대는 현재의 의미가 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고대에 노예제를, 중세에 봉건제[농노]를, 근대에 자본주의[임금노동]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전통적 삼분법은 더욱 개념화하였다. 또한, 근대가 너무 길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취지에서 최근세(contemporary), 곧 현대라는 개념도 등장하여 널리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근대’를 역사화한 셈이다.

한편 어떤 나라나 문명권이 중세에서 근대로 바로 진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당한 기간의 과도기를 거쳐야 가능하다. 이 시기를 흔히 ‘근세’라고 하는데, 영어권 학자들이 사용하는 early modern과는 의미가 다소 다르다.

근세는 중세를 벗어나서 근대를 향해 진화해 나아가는 과도기나 전환기를 의미하는 측면이 강하다. 아직 근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early modern은 말 그대로 초기 근대, 곧 근대의 초기라는 의미로, 중세와 근대 사이의 전환기라기보다는 이미 근대로 들어섰다는 의미가 강한 편이다. early modern 개념이 가능한 이유는 서구 유럽의 역사에서는 르네상스와 같이 중세를 해체하는 기간이 꽤 오래 이어졌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사조가 강력한 최근에는 거시적 시대구분을 중시하지 않는다. 시대구분의 근대적 기준에 대한 회의가 편만(遍滿)하기 때문이다. 삼분법과 같은 시대구분이야말로 근대역사학의 산물인데, 근대의 거의 모든 기준과 가치를 해체하고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던 사조가 역사학계를 강타함에 따라, 엄정한 구분 기준이 생명인 시대구분 자체가 역사학자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대상의 상대화가 강할수록 시대구분의 기준도 그만큼 절대성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근대를 벗어난 포스트모던 현재에서 중세적 모습을 찾는 움직임조차 있다. 지구사(global history) 시각에서도 새로운 시대 논의가 있지만, 아직 틀을 갖춘 상태는 아니다.

시대구분의 연원과 일반적 사례

거시적 시대구분을 최초로 시도한 인물은 서기전 7세기 무렵 그리스의 헤시오도스(Hesiodos)였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시대구분의 기준에 일관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으나, 역사를 시대별로 특화하고 그 특화의 기준을 시대 명칭에 축약하여 드러낸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중국사에서는 주나라에서 봉건 제후가 ‘함부로’ 칭왕(稱王)한 것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춘추시대, 이후를 전국시대로 구분한 것이 시초이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그 시대를 살았던 공자의 저서 『 춘추』에서 따왔다. 이로써 보면, 서기전 동서양 지식인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볼 때 무엇을 중시했는지 잘 드러난다.

물질과 인간[영웅]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 문명권과 칭왕, 곧 질서와 혼란이라는 프리즘으로 시대를 나눈 문명권 사이에는 처음부터 일정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는 동서양 모두 대개 왕조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이는 왕정이 모두에게 매우 익숙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니 동로마제국이니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이니 하는 용어나, 부르봉 왕조니 스튜어트 왕조니 하는 명칭 속에도 시대구분의 의미가 엄연히 들어 있다.

중국에서도 애초부터 왕조별로 기전체의 정사를 편찬하는 방식이 발달하였다. 한국사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사 이해의 기둥 격인 『 삼국사기』나 『 고려사』 모두 기전체 사서인 점은 그 좋은 예이다. 요컨대, 세계 역사에서 볼 때, 국가 형태를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갖춘 후에는 왕조의 교체를 시대구분의 주요 기준으로 삼은 공통점이 있다.

왕조 외에는 시대 개념이 아직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왕조를 초월한 시대구분이 간간이 이어졌다. 대표적 사례로, 불른두스(Flavius Blondus, 1388~1463)는 이전 역사를 고대와 중세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후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켈러(Christoper Keller)는 자신이 인지하는 범위의 유럽사를 고대사[콘스탄티누스대제까지], 중세사[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까지], 근대사[1453년 이후]로 구분하였다.

이런 시대구분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자신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역사를 나누어 종합적으로 이해한 수준이었다. 즉, 고대나 중세 내지는 근대의 의미에 시간의 원근이라는 기준이 강한 편이었다.

이후 중세라는 용어는 널리 회자하였다. 르네상스 이래 근세 지식인들은 인본주의 시각에서 당시를 색다른 현재(modern)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비판하고 벗어나려 한 바로 이전 시대, 곧 중세를 최대한 비하하였다. 이른바 중세 암흑기(medieval dark age)라는 용어와 개념도 이때 등장하였다.

근대를 절대 선(絕對善)으로 수용한 근대주의자의 처지에서 중세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중세 인식은 근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말로 근대의 절대성을 해체하고 상대화하는 사조가 유행하면서 새롭게 변하였다. 중세의 발전적 변화 없이는 근대도 불가능했다는 역사 인식이 계속하여 세를 불려갔다. 요즘 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이렇듯 역사의 시대구분 문제는 근대역사학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역사학이란 앞서 약술한 근대의 기본 특성뿐만 아니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시각을 공유한다. 먼저, 역사상의 모든 현상을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는[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과학(science)의 한 분야로 역사학을 자리매김한 새로운 경향을 뜻한다.

이에 따라, ‘철저한’ 사료 검증과 비판, 모든 역사 현상의 원인과 결과 논증, 비합리적이고 추상적 ‧ 이념적인 이전전근대의 역사 서술을 비하하는 태도, 역사가의 주관을 배척하고 객관성만 강조한다는 연구방법론, 그렇기에 자신들이 설정한 근대의 기준에 못 미치는 다양한 문명을 손쉽게 야만[barbaric, uncivilized]으로 취급해버리고 더 나아가 지배하며 선도하려는 오리엔탈리즘 사고방식, 근대 문명이라는 절대 기준에 기초한 역사관 ‧ 문명관 ‧ 세계관 등이 이른바 근대역사학의 특징이다.

근대 이전의 장구한 역사를 전근대(premodern)라 하여 비문명(uncivilized)이라는 동질의 시대로 규정해버린 ‘학문적 오만’도 이런 근대역사학의 산물이다.

근대역사학이 제시한 가장 이른 시대는 선사시대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history)란 어떤 형태로든 문자, 곧 텍스트로 남긴 기록이라는 의미다. 단순히 주술적인 동굴벽화는 아니다. 따라서 선사시대는 원시시대와도 흔히 혼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원시시대라 해도 문자의 발달 단계에 따라 편차가 크므로, 선사시대와 원시시대를 무조건 동의어로 볼 수는 없다.

문자 기록이 없다 보니 이 시대의 특성화는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 등 고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고고학에서는 이 시대를 인간이 주로 사용한 도구의 소재 및 가공방식에 따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생산 수단과 방식[기술]의 변화로 시대를 구분해 파악한, 그래서 일종의 유물사관인 셈이다. 사회 구성과 운용에 중점을 두어 씨족사회나 부족사회 내지는 추장사회[chiefdom]로 개념화한 시대구분도 있지만, 그 일반화의 어려움과 추상성이라는 문제로 역사학계에서는 아직 주류를 점한 적이 없다.

각종 교과서에서 여전히 석기시대니 청동기시대니 하는 시대구분 방식을 널리 수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첨단장비의 도움으로 유적과 유물의 발굴이 몹시 활발하다 보니, 같은 구석기나 신석기 또는 청동기나 철기시대 안에서도 시기를 세분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한국사 시대구분 추이

전근대

그렇다면 근대역사학이 들어오기 전 한국사의 전통적 시대구분은 어떠했을까? 한국사 시대구분의 원조는 단연 『삼국사기』라 할 수 있다. 통사로 온전히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기전체 통사가 12세기 고려왕조에서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여기서는 신라 천 년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통일 이전 시기를 상대(上代)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나라의 통치체제가 국왕을 중심으로 비교적 잘 작동하던 문무왕 대부터 경덕왕 대(661~765)까지를 중대(中代)로, 혜공왕 이후 왕위 쟁탈전이 심해지면서 신라가 서서히 쇠락하던 시기를 하대(下代)로 명명하였다. 하지만 구분의 기준은 흥기 ‧ 통일[전성기] ‧ 쇠락이라는 전통적 방식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13세기 후반에 승려 일연(一然)이 집필한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시대를 상고(上古)와 중고(中古: 지증왕 이후), 하고(下古: 혜공왕 이후)로 삼분하였다. 명칭만 봐서는 『삼국사기』의 시대구분과 흡사하지만, 중고의 시점을 6세기 벽두의 지증왕 대부터 잡은 점이 색다르다. 이는 삼국통일이라는 미증유의 크나큰 사건보다는 신라가 왕국의 모습을 갖추고 발전하다가 쇠락하는 과정을 중시한, 그래서 당시로서는 ‘참신한’ 시대구분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에 들어와서도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이 절대적 대세였다. 예컨대 『 동국통감(東國通鑑)』이나 『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조선 초기의 사서에서 이전의 역사를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 등으로 구분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런 구분법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계기로 통치구조나 사상 ‧ 종교적으로 이전 시대와는 다른 중요한 변화가 발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로 편찬함으로써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유교식 왕조사관의 영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어떤 이론이나 설명도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1900년~1945년

근대역사학은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서구식으로 한국사를 시대 구분한 최초의 인물도 일본인 역사학자 다이스케[林泰輔]였다. 『 조선사(朝鮮史)』를 읽고 다이스케의 한국사 시대구분을 그대로 수용한 사서는 현채(玄采)『동국사략(東國史略)』(1906)이다.

이 책은 중등 교과서로 간행하였는데, 여기서는 한국사를 태고사[단군삼한], 상고사[삼국후삼국], 중고사[고려], 근세사[조선]로 구분하였다. 이는 각 시대의 명칭에도 잘 드러나듯이, 시간의 원근을 왕조의 교체와 조합하여 구분하였을 뿐이다.

1909년 황의돈(黃義敦)은 『 대동청사(大東靑史)』[필사본]를 집필하면서 한국사를 네 시대로 구분하였다. 상고[단군삼국 이전], 중고[삼국시대몽골족의 침입], 근고[몽골족의 압제~조선시대 말기]로 구분하였다. 국가 존망의 백척간두 상황에서 대외항쟁을 시대구분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1923년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와 1926년 『중등조선역사』에서는 한국사를 다섯 시대로 새롭게 나누었다. 즉, 상고[단군열국시대], 중고[삼국시대남북조시대], 근고[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최근세[대원군 집권 이후]로 구분하였다. 나라가 망함으로써 대외항쟁의 주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편의상 왕조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한 셈이다. 근세나 최근세 같은 근대역사학의 시대구분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특별한 의미보다는 일본인 학자들의 통설을 그대로 따른 것에 가깝다.

1916년 장도빈(張道斌)은 『국사(國史)』[필사본]를 집필했고, 1923년에는 이를 수정 보완하여 『조선역사요령(朝鮮歷史要領)』과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을 저술하였다. 이들 저서에서 그는 한국사를 고대[고조선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최근[대원군 집권 이후]으로 크게 삼분하였다. 고대는 다시 상고[고조선삼한시대], 중고[삼국시대~남북조시대], 근고[고려시대]로 세분하였다. 고대나 근세 같은 용어를 쓰면서도 여전히 왕조를 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하였다.

1923년 안확(安廓)은 『 조선문명사』라는 통시적 정치사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상황과 성격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즉, 소분립 정치시대[상고고조선삼한시대], 대분립 정치시대[중고,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귀족 정치시대[근고고려시대], 군주독재 정치시대(근세조선시대) 등 모두 네 시기로 나누어 한국사를 이해하였다. 세계사의 보편적 시대구분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으나, 각 시대의 특징을 그 시대의 이름으로 삼은 점에서 근대역사학에 접근한 최초의 시도이다.

1931년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역사(朝鮮歷史)』에서 한국사를 상고[고려 이전], 중고[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최근[대원군∼한국병합]의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1943년의 『 고사통(故事通)』과 8 ‧ 15광복 직후인 1946년에 간행한 『 국민조선역사』에서도 같은 시대구분을 유지하였다. 이는 1909년에 황의돈이 시도한 시대구분과 거의 같은 것으로, 시대구분을 위한 학문적 고민이라는 측면에서는 안확에도 크게 못 미친다.

이로써 보면 8 ‧ 15광복 이전에는 고대나 근세 같은 서구식 시대구분 용어를 일부 수용하기는 했어도, 실제로는 왕조의 흥망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전통적 방식이 강고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안확의 시대구분이 학자적 고민의 산물이자,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이론적으로 접근한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광복~1980년대

8 ‧ 15광복 이후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은 개설서가 주도하였다. 한국사 연구가 일천한 상황에서 중등학교나 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할 개설서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각종 개설서에서 여러 시대구분을 시도했으나, 이론적 기반도 약했고 여전히 왕조 중심의 구분이 대세였다.

1947년 김성칠은 『조선역사(朝鮮歷史)』에서 상고사 ‧ 중세사 ‧ 근세사 등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조선왕조를 근세사에 포함하였다. 1949년 손진태는 『 국사대요(國史大要)』(1949)에 민족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민족형성 태동기[선사시대], 민족형성 시초기[고조선~삼한], 민족통일 추진기[삼국시대], 민족결정기[통일신라시대], 민족의식 왕성기[고려시대], 민족의식 침체기[조선], 민족운동 전개기[일제강점기] 등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사회 형태의 변화에 주목하여 씨족공동사회[선사시대], 부족국가시대[고조선삼한시대], 귀족국가시대[삼국시대조선시대]처럼 삼분하였다. 1950년 이인영도 『 국사요론(國史要論)』에서 민족을 기준으로 삼아 민족 태동기[원시씨족사회삼국시대], 민족 성장기[통일신라조선 세종대왕], 민족 침체기[세종대왕 이후갑오경장], 민족 각성기[갑오경장일제강점기] 등으로 구분하였다.

1952년에 그는 『국사개설』에서 신라부터 고려까지를 모두 봉건적 귀족국가시대로 묶었다. 1953년 이병도는 『국사대관(國史大觀)』에서 상대[고조선신라], 중세[고려], 근세[조선], 최근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그가 주도하여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 한국사(韓國史)』 6책(19591965)에서는 고대편[통일신라까지], 중세편[고려], 근세편[조선], 최근세편[대원군 이후], 현대편[갑오경장 이후]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개설서가 나왔으나,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개 왕조를 중심으로 목차를 구성하였다. 왕조를 기준으로 한 시대구분인 셈이다. 중세나 근세 같은 시대구분 용어를 사용하거나 민족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였으나, 그 실상 역시 왕조의 흥망에 따른 전통적 시대구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식민지 경험이라는 ‘아픈’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국망(國亡) 이전, 곧 조선 후기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생적 근대의 기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1962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와 진단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제1회 동양학 심포지엄에서 ‘한국근대화 문제’를 주제로 정한 것은 좋은 예이다. 여기서 천관우는 개항이 근대화의 계기는 되었으나 근대화의 기점은 갑오경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1963년에는 한국사학회 주최로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사회적 변동’이라는 주제로 학술토론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최영희 · 김용섭 · 유교성 · 김용덕 등은 각기 신분제의 동요, 농촌경제력의 향상, 상공업 발달, 실학과 동학의 유행을 부각함으로써 조선 후기를 근대로 나아가는 변화의 시대로 파악하였다.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의 모습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67년 이기백이 저술한 『 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에서는 기존의 왕조 중심 시대구분과 고대 ‧ 중세 ‧ 근대 식의 일반적 삼분법을 모두 지양하고, 한국 역사에서 실재한 지배층의 성격을 중심으로 시대를 10여 개로 세분하였다.

‘호족의 시대’나 ‘양반사회의 성립’ 같은 단원명이 그런 예이다. 이는 그동안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왕조 중심 시각과 전통적 삼분법을 뛰어넘어 일정한 기준을 적용하여 통시적으로 시대를 구분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려와 조선 왕조를 발전론 맥락에서 차별화한 것이다. 이전에도 고려시대를 중세로, 조선시대를 근세로 보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때 중세나 근세는 시간의 원근에 따른 구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기백은 고려를 귀족사회로, 조선을 양반사회 및 양반관료국가로 차별화하여 이해하였다.

이는 지배층으로서의 양반 지배층이 신라의 진골 귀족이나 고려의 문벌 귀족에 비하면 능력[학식]을 중시하고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체제를 훨씬 더 공고히 한, 그래서 고려와는 다른 사회로 발전했다고 본 것으로, 시대구분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고려와 조선의 차별화를 이기백이 처음 시도하지는 않았다. 1954년 한우근김철준과 함께 집필한 『국사개론(國史槪論)』에서 조선을 ‘유교적 관료적 집권국가’라고 성격을 규정하여 고려와 차별화한 바 있다.

이즈음 중세의 기점 문제도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1965년 강진철은 국가의 수취 대상이 사람[노동력]에서 토지[생산물]로 바뀌는 전환기를 무신정권 때로 보고, 이를 중세의 기점으로 보자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의미 있는 문제 제기였으나, 별다른 호응을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1970년에는 한국경제사학회에서 『한국사시대구분론』을 출간하였다. 여기서 김철준은 농민이 고대 예민적(隸民的) 성격에서 농노적 성격으로 변한 점과 신라의 골품제와는 달리 유교 정치이념과 보편적 불교사상이 주류로 부상한 고려를 다른 시대로 확연히 구분하였다. 나말여초(羅末麗初)를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의 넘어가는 전환기로 파악한 것이다.

같은 책에서 천관우는 실학, 대동법, 노비 해방 등의 근대적 요소를 근거로 17세기 초나 18세기부터 1919년 3 · 1운동 혹은 1945년 8 ‧ 15광복에 이르는 200~300년의 시기를 중세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라는 의미로 ‘근세’라는 시대 설정을 제안하였다. 또한, 근세는 근대 이전의 시대(premodern)라는 의미임을 분명히 하였다.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로서의 ‘근세’ 개념을 천관우가 처음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근세 인식은 1970년대 학계에 널리 수용되었다. 1970년 한우근은 『 한국통사(韓國通史)』에서 원시사회, 부족사회, 부족연맹사회, 고대[삼국시대], 고대통일국가[통일신라, 발해], 중세[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근대[대원군 집정~갑오개혁], 현대[독립협회 이후] 등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고려와 조선의 시대적 차별화로는 고려를 귀족국가 ‧ 귀족사회로, 조선을 양반관료국가 ‧ 양반사회로 명명함으로써 시대구분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여전히 왕조 교체에 따른 시대구분이기는 해도 시대의 성격을 달리 규정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중세와 근세를 단지 시간의 원근 차이가 아니라 국가 성격의 발전적 차이[귀족→ 관료]에 따른 개념어로 사용한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발전사관’은 1974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한국사』 시리즈를 통해 사실상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귀족적 색채가 강한 고려를 중세로, 관료적 성격이 강해진 조선을 근세로 보는 시대구분론이 학계에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후 1970~1980년대에 나온 한국사 개설서는 대개 이런 시대구분을 그대로 따랐고, 이런 추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주류를 이룬다.

물론 일부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가 집필한 개설서에서는 생산 수단인 노동력의 성격이나 생산 관계의 변화를 기준으로 삼아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사회[농노제], 근대 자본주의사회[임금노동] 같은 삼분법을 여전히 사용했하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학계의 소수 의견에 머물렀다. 한국사에서 봉건제의 존재 여부와 관련하여 대토론을 벌인 1980년대 이후로는 기세가 한층 더 꺾였다.

1980년대에도 이전의 시대구분 방식, 곧 왕조를 기준으로 삼되 거기에 역사 발전의 의미를 강하게 부여하는 시대구분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나온 각종 개설서나 교과서에서 이런 경향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1980년대는 군부를 포함한 엘리트 독재에서 제도적 민주화로 진전하는 거대한 전환기이자 과도기였는데, 시대구분론도 이런 시대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80년대에는 민중사관이 강력히 대두하면서 노동자 ‧ 농민을 민족과 연계하여 역사의 주체로 보려는 시각이 큰 세를 얻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기존의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이나 고대 ‧ 중세 ‧ 근대라는 삼분법 모두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민중사학은 한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시대 구분하는 데 소홀하였다. 이념의 실천을 통한 현재의 사회변혁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도 이런 새로운 움직임은 당시 일부 소장 역사학자의 호응을 끌어냈다. 사회변혁이 절실하던 시기였기에, 변혁의 실천적 방략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되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론에 입각해 역사의 구조와 진전을 총합적으로 파악하려 한, 그래서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위한 일종의 ‘역사해석학’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사회구성체란 각 구성체가 담당하는 생산양식과 상부구조의 총화이지만, 그런 관계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이되 본질적으로는 서로 끝없이 갈등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특히, 근대 또는 근대화와 관련한 방법론으로는 테제(these)와 안티테제(anti-these)라는 헤겔의 변증법에 의존하였으며, 갈등과 지배구조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른바 종속이론이나 세계시스템 등의 이론을 생산하였다.

역사의 시대구분과 관련해서는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이론에 따른 삼분법을 절대시하였다. 이런 시대구분의 사례로는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 2책(1986)과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사강의』(1989) 및 이를 개정한 『한국역사』(1992)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민중사』에서는 원시 · 고대사회[삼국시대까지], 중세 1기[삼국통일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세 2기[조선시대], 근대 1기[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근대 2기[일제강점기], 현대[8 ‧ 15광복 이후]로 한국사의 시대를 크게 구분하였다.

『한국역사』에서는 원시사회, 고대사회[고조선삼국시대], 중세사회[통일신라19세기 후반], 근대사회[개항 이후∼일제강점기], 현대사회[8 ‧ 15광복 이후]로 구분하였다. 1994년 한길사 간행 『한국사』도 『한국역사』와 동일하게 구분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시대구분은 북한에서 1979~1983년에 걸쳐 출간한 『 조선전사(朝鮮全史)』와 거의 일치한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역사 해석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1990년 무렵 연쇄적으로 급격히 무너지면서 학계에서 점차 쇠락하였다. 특히, 시대구분과 관련해서는 그 입지를 거의 상실하였다.

고대 ‧ 중세 ‧ 근대라는 전통적인 명칭만 여전히 회자하는 상황이다. 또한, 근대의 모든 기준을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던 사조가 강해지면서 역사의 시대구분 자체가 역사가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1990년대~현재

1990년대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는 여전히 왕조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는 대체로 개설서에 잘 나타나며, 여전히 회자하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의 시대 명칭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가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했다는 점이다. 다만,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새로운 이론이나 담론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일반적 의미의 평범한 시대구분에 머문 면이 강하다.

먼저 1994년 단국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한국학연구』라는 저널의 창간 특집으로 한국학 제 분야의 시대구분론를 규합하였다. 주로 고대 ‧ 중세 ‧ 근대라는 전통적 삼분법을 놓고 한국사에서 중세와 근대의 기점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집중하였다.

가장 주목할 것은 경제사 분야에서 제기한 근대의 기점이다. 하지만 그 기준을 국민국가의 등장과 시민계급의 형성 및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전제하는 등 기존의 인식과 별다른 차이는 없다. 또한, 이런 기준을 적용할 때 과연 1860년대를 근대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1876년 개항이나 1894년 갑오개혁 등을 근대의 기점으로 잡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한 실증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다 보니, 분야[주제]별 시대구분을 다양하게 제시했음에도, 대개 불교 시대나 성리학 시대처럼 한국사에 나타난 사례별 특성으로 구분했을 뿐이지, 이론 틀을 갖춘 시대구분론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1995년 초 한국고대사연구회에서도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조명한 저서를 발간하였다. 주로 고대와 중세의 기점을 살폈다. 생산양식과 국가의 수취제도 변화, 지배 이데올로기의 변화, 불교의 역할, 가족 등 생산 관련 특정 집단의 성격 변화 등을 주요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상 시대구분의 보편적 기준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한국사라는 사례에만 그친 면이 있다.

같은 해 차하순 등이 출간한 『한국사 시대구분론』에서도 그간의 시대구분 관련 문제를 두루 다루었다. 시대구분의 이론과 사례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국사에 적용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고민하였다.

이 책에서는 시대구분 자체가 근대역사학의 산물이라는 점과 전통적 삼분법에 대한 비판 및 한국사 적용상의 문제점을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다만, 구분 기준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민족의식의 성쇠, 정치 형태와 이데올로기의 변화, 지배 세력의 성격 변화, ‘민중’의 등장 등 대개 한국적 사례에 기초한 시대구분이라는 점에서, 시대구분의 보편성은 여전히 약하다. 오히려 서구 중심의 ‘보편적’ 시대구분론에 한국사를 맞추려 한 면도 있다.

같은 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연구』를 출간하였다. 역사의 시대구분론 및 한국사 적용과 관련하여 이론적 문제 제기도 있으나, 대체로 분야[주제]별 시대 안에서 세부적 시기 구분을 시도한 점이 돋보인다.

서양사나 중국사의 시대구분과도 비교를 시도하였다. 다만,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제 제기나 획기적 담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한국사를 시대별로 세분한 데 의미가 있는데, 그런 세분의 기준도 통시적 일관성은 약하다.

그렇다면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 또는 수험서에서는 시대구분에 별다른 변화가 없던 1990년대에 학계에서는 왜 시대구분 논의가 활발하였을까? 그에 대해서 몇 가지 요인을 추정할 수 있다.

1970~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도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그래서 지극히 ‘근대적’ 역사관이 더욱 거셌던 점, 이로써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했다는 자신감의 발로, 그리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근대 콤플렉스’가 강한 세대의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현실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같은 1990년대에 포스트모던의 파고가 국내 학계를 강타한 사실은 이래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구분의 근대적 기준에 대한 회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식 시대구분 기준의 상대화와 함께 거시적 시대구분 논의는 수그러들었다. 요컨대, 1990년대는 시대구분 논의가 만개했으면서도 동시에 시들기 시작한 전환기였다.

이런 추세에서 한국사의 시대구분 논의는 크게 두 갈래로 나아갔다. 하나는 중세나 근대 또는 삼국시대나 조선시대 같은 큰 시대구분 안에서 다시 시기를 세분하는 논의이다. 다른 하나는 근대의 의미를 지역화[상대화]하여 ‘다양한 근대’를 발굴해 부각하고 이론화하는 담론이다. 전자가 여전히 근대역사학의 영향권 안에 있다면, 후자는 말 그대로 포스트모던 시각이다.

시대 안의 시기 구분으로는 조선 전 ‧ 후기론과 중기(中期)론 논쟁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전통적인 전 ‧ 후기론은 임진왜란(1592~1598)이라는 전대미문의 전쟁을 계기로 이후 시기, 곧 조선 후기를 중세적 국가 ‧ 사회 시스템이 서서히 해체되면서 근대로 근접하는 전환기로 파악한다.

이에 비해 중기론은 왜란이라는 외부적 충격보다는 사족 지배 질서의 구축과 약화라는 기준을 내세워 16세기와 17세기를 동질의 시기로 보아 조선 중기라 명명한다. 다만 전자는 해체의 대상인 중세가 무엇인지 애매하다는 문제가 있다. 후자는 15세기와 18세기에 과연 향촌 질서로서의 사족 지배체제가 허약했는지 의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다양한 근대’나 ‘유교적 근대’라는 식의 새로운 시대 개념도 적잖이 등장하였다. 서구 중심의 절대적 근대 기준을 해체하고 상대적 근대를 다양하게 찾는 움직임이다.

장기적 사회경제 맥락에서 소농사회(小農社會)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개 이런 상대적 근대론을 지지한다. 민중을 중시하는 학자들도 ‘다양한 근대’ 담론에 합승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유물사관론과 민족에 기초한 역사 이해가 절대적이므로, 시대의 흐름에 상관없이 유물론적 주체라는 관점의 시대구분이 고정적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중세로 보고, 그 이전을 고대로, 1860년대부터 1910년대를 근대로, 1926년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 동맹을 제창한 것을 계기로 그 이후를 현대로 구분한다.

이후로도 시대구분 문제로 논의가 일었는데, 대개는 단군릉을 중시하여 고대의 기점을 크게 상향하거나 근대의 기점 설정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배적이다. 또한, 근대의 기점을 1860년대로 보되, 그 안에서 시기를 세분하는 작업도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역사학 자체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었으므로, 학문적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한국사 시대구분론의 특징과 문제

한국사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왕조 교체를 기준으로 역사를 순환론적으로 이해하는 유교적 전통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은 매우 강하여, 근대역사학을 통해 고대, 중세, 근대라는 서양의 삼분법을 도입한 후에도 왕조별 시대구분과 적절히 조합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고대[고조선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개항일제강점기], 현대[8 ‧ 15광복 이후]라는 혼합형 구분은 그 좋은 예이다.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방식으로만 구분하더라도 결국에는 왕조별로 끊을 수밖에 없는 문제에 직면한다.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방식의 시대구분이 대세인 적도 있었지만, 한국 역사에서 과연 고대가 노예제 사회였는지, 특히 정치적 ‧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과연 봉건제가 존재하였는지 등과 같은 실증 관련 약점이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의 시대구분 방식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중세라는 용어 대신에 차라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라 명명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문제에 닿아 있다.

근대의 기점 설정도 한국사 시대구분의 특징이자 문제이다. 다소 이견이 있어도 한국사에서는 근대의 기점을 대개 1860년대와 1876년 개항으로 본다. 전근대와 근현대로 양분할 때 분기점이다. 이는 국제 질서의 패러다임 변화 내지는 국가의 개혁정책이나 민중의 성장 등을 기준으로 삼은 결과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조건만으로 근대라 총칭해 개념화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근대의 핵심 요소인 산업화가 그때부터 본격화했는지, 근대의 또 다른 주요 요소인 신분제 폐지와 정치 참여 인구의 대폭 확대 등의 현상이 1860년대에 가시화하였는지, 지식인 사이에서 과학적 ‧ 합리적 사유체계가 강력하게 대두한 때가 틀림없이 1860~1870년대 즈음인지 등의 본질적 문제가 여전하다. 사회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지 않은 채 어느 한두 가지 현상만으로 근대를 규정하는 방법론에 따르는 태생적 약점이다.

이런 문제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근세의 기점으로 보는 방법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근거로는 흔히 관료체제의 수립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 및 『 경국대전』 등의 법전 체제 확립 등을 꼽는다.

조선왕조와 함께 관료체제가 크게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근세를 논한다면 한국사는 중국사보다 현저히 낙후했다는 ‘부메랑’식 결론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관료체제로 본다면 중국은 당나라 또는 북송 때부터, 중앙집권체제로 보자면 한나라 때부터 근세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전 체제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의 약 40%가 노비인 사회를, 중세 기독교에 버금갈 정도로 주자학 근본주의가 지배적이던 사회를 과연 근세라 쉽게 규정할 수 있는지 문제이다. 요컨대 합리적 ‧ 보편적 시대구분을 위해서는 시대상의 종합적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사의 시대구분에서 또 다른 특징이자 문제는 시대구분론이 학계의 연구 축적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개설서의 목차 구성을 통해 성급하게 등장하여 정설화한 점이다. 물론 8 ‧ 15광복 후 한국사를 제대로 교육할 교재가 변변치 않던 초기에는 개설서의 집필이 매우 절실하였다. 또한, 개설서를 쓰려면 어떤 식으로든 통시적 시대구분이 불가피하였다. 하지만 국내 학계의 연륜이 꽤 쌓인 후에도 획기적 발전은 미미하였다.

시대구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놓고 이론적으로 고민하기보다는 한국사의 특수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시대구분이 대종을 이루었다. 앞서 기술한 근대나 근세의 기점 논란 및 그 약점 문제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양한 근대’라는 최근의 사조에도 일부 문제가 있다. 먼저 "근대라는 용어의 의미가 역사학계에서 분명한데, 결이 매우 다른 근대를 말하면서 굳이 같은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또한, 근대라는 말 속에 은연중 녹아 있는 근대 우선주의 시각도 간과할 수 없다.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이미 서구 중심 시대구분의 자장 안에 갇힌 셈이기 때문이다. 앞에 아무리 여러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근대라는 용어를 계속 쓰는 한 서구 중심주의의 옷을 완전히 ‘탈(脫)’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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