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28조 ()

고려시대사
문헌
고려 전기, 문신 최승로가 성종에게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정책서이자 상서문.
문헌/문서
용도
사회개혁안 상서문
관련 인물
최승로
내용 요약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는 고려 전기 문신 최승로가 성종에게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정책서이자 상서문이다. 982년(성종 1) 6월에 정광(正匡) 행선관어사(行選官御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있던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서문이다. 최승로가 지은 이 시무 상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성종 이전의 왕인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에 이르는 5대조의 정치에 대하여 본받을 것과 경계할 것을 평한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이고, 뒷부분은 왕을 위해 당시의 구체적인 시무책을 제시한 「시무28조」이다.

정의
고려 전기, 문신 최승로가 성종에게 당면한 과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정책서이자 상서문.
제작 및 발급 경위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는 982년(성종 1) 6월에 성종(成宗)이 경관(京官) 5품 이상자들에게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주1주2을 논하게 하자, 정광(正匡) 행선관어사(行選官御事) 상주국(上柱國)으로 있던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상서문(上書文)이다.

최승로가 지은 이 시무(時務) 상서(上書)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성종 이전의 왕인 태조(太祖, 재위 918~943), 혜종(惠宗, 재위 943~945), 정종(定宗, 재위 945~949), 광종(光宗, 재위 949∼975),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 이르는 5대조의 정치에 대하여 본받을 것과 경계할 것을 평한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이고, 뒷부분은 왕을 위해 당시의 구체적인 시무책을 제시한 「시무28조」이다. 최승로는 당(唐)나라 사관(史官) 오긍(吳兢)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편찬한 경위, 곧 당나라 현종(玄宗, 재위 712~756)에게 태종(太宗, 재위 629~649)의 정치를 본받아 이상적인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출 것을 권한 내용을 참고하여 장문의 시무책(時務策) 28조항을 올렸다.

형태와 내용

「시무28조」는 성종이 친히 개봉(開封)하도록 별도로 밀봉(密封)해서 올린 것으로, 성종 대에 이루어져야 할 정치 개혁을 모두 28개 조목으로 나누어 최승로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피력한 것이다. 28조 중 현재 알 수 있는 내용은 22조까지이며, 나머지 6조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6조는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침입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6조의 내용에 대한 복원 작업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시무28조」의 내용은 새 국왕(성종)이 해야 할 당면 과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건의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요충지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활을 잘 쏘고 을말 잘 타는 사람을 골라 국경을 지키는 데에 충당하고, 또 그중에서 2~3명의 주6을 뽑아서 그들을 통솔하게 하시면, 곧 중앙의 군사들[京軍]은 다시 주29를 서는 노고를 면할 것이며, 주7과 군량을 급히 실어 나르는 비용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2. 불사(佛事)를 많이 베풀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많고,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였으며, 여러 범죄자들 중 모습을 바꾸어 승려가 되거나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는 무리들이 와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뒤섞여 재에 참여하는 일이 많습니다. 원컨대 군왕으로서의 체통을 바르게 하여 이익이 없는 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우리 왕조를 시위하는 병사는 태조 때엔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나, 뒤에 광종이 풍채 좋은 자를 뽑아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좇아서 날래고 용맹한 자들만을 남겨 두시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파하여 돌려보내신다면, 사람들 사이에 탄식과 원망이 없어질 것이며, 나라에는 비축물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4. 성상께서 미음 · 술 · 메주 · 국을 길 가는 사람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만약 밝게 상을 주고 벌을 내려서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장하신다면 복을 부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세한 일 같은 것은 임금이 정치를 행하는 요체가 아니니,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5. 태조께서는 수년에 한 번씩 사신(使臣)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닦았는데, 지금부터는 주11을 위해 보내는 사신이 무역을 겸하게 하시고, 그밖에 수시로 매매하는 행위는 모두 금지하시기 바랍니다.

  6. 주12에 배정된 돈과 곡식은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각각 주(州) · 군(郡)에 사람을 파견하여 해마다 절반에 달하는 이자[長利]를 받아 백성들을 고되고 어지럽게 하고 있으니, 모두 금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돈과 곡식은 사원의 전장(田莊)으로 옮겨 설정하면 민간에 끼치는 폐해가 줄어들 것입니다.

  7. 우리 태조[祖聖]께서도 통일한 후에 주13을 두고자 하셨지만, 대개 초창기라 일이 번다하여서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가 향리토호(土豪)들을 살피건대, 항상 공무(公務)를 핑계 삼아 백성들을 침범하여 포학하게 행동하므로 백성들이 그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외관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8. 성상께서 사신을 보내어 사굴산(闍屈山)의 승려 여철(如哲)을 맞아 궁궐로 들이셨습니다. 전에 선회(善會)라고 하는 자가 요역(徭役)을 회피하고자 출가하여 산 속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광종께서 공경을 표하고 예를 다했지만, 끝내 길가에서 예기치 못한 채 참혹하게 죽어 그 시신이 나뒹굴게 되었습니다. 저 평범한 승려의 경우에 자신 또한 화를 당하였는데, 무슨 겨를에 남에게 복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여철을 산으로 돌려보내셔서 선회와 같은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9. 주16들로 하여금 조회(朝會)할 때에는 모두 중국과 신라(新羅)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公襴)과 신발 · 홀을 갖추고[穿執], 정사에 관하여 아뢸 때에는 버선목이 달린 신[襪靴] · 명주신 · 가죽신을 착용하게 하시며, 주17들은 무늬가 있는 깁과 주름이 잡힌 비단을 입지 못하고 다만 명주[紬絹]만을 사용하게 하십시오.

  10. 승려들이 군(郡) · 현(縣)을 오갈 때에 관(館) · 역(驛)에 숙박하면서 지방 아전들과 백성들을 채찍질하고, 마중하고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늦다고 꾸짖는 등 그 폐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승려들이 관 · 역에서 숙박하는 것을 금지하시기 바랍니다.

  11. 예악(禮樂) · 시(詩) · 서(書)의 가르침과 군신(君臣) · 부자(父子) 간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음으로써 비루한 것을 개혁하고, 그 나머지 거마(車馬)나 의복의 제도는 그 지방의 풍속을 따라도 좋을 것이니, 사치와 검약이 적절하도록 하신다면 무작정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12. 여러 섬에 사는 백성들은 그 선대의 죄로 인하여 바다 한가운데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생계를 꾸리기가 매우 어려우며, 또 주32에서 수시로 물품을 징수하기 때문에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주 · 군의 예를 따라서 공역(貢役)을 공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13. 봄에는 연등회(燃燈會)를 설행하고 겨울에는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기 위해 사람들을 징발하는데, 그 주18이 매우 번거로우니 줄여서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인형은 흉례(凶禮)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으로서 중국[西朝]의 사신이 일찍이 와서 보고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으니, 지금부터는 쓰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4. 성상께서는 날이 갈수록 더욱 근신하고, 스스로 교만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을 대함에 공손함을 생각하고, 만약 혹시 죄지은 자가 있더라도 그 경중을 법에 맞게 논의하시면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위업은 서서 기다려도 될 것입니다.

  15. 지금 궐내의 마구간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아 비용이 매우 많이 드니,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고 있으며, 변경 지역에 변란(變亂)이 생길 경우에는 군량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모두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중의 노비와 마구간 말의 수를 잘 헤아려 결정하시고, 그 나머지는 모두 궁 밖으로 나누어 내보내시기 바랍니다.

  16. 세상의 풍속에서는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명목으로 각자 자신의 바라는 바를 따라 불당(佛堂)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또 도성(都城) 안팎에 있는 승려들도 앞을 다투어 지으면서 널리 주 · 군의 주20들에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사역하되 국가의 부역[公役]보다도 더 급하게 하도록 권유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엄중하게 금지하여 고된 부역을 덜어 주시기 바랍니다.

  17. 근래에 사람들 사이에 높고 낮은 구분이 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곧 모두 집을 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 · 군 · 현과 정(亭) · 역 · 나루터[津渡]의 호강한 자들이 앞을 다투어 큰 집을 지어 그 법도를 넘어서게 되었으니, 단지 한 집의 힘을 다 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백성들을 고되게 하는 것으로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그 높고 낮음에 따라 가옥의 제도를 헤아려 정하게 하시고, 도성 안팎에서 모두 준수하게 하시며, 이미 지은 가옥 중 제도를 어긴 것들은 또한 헐어 버리게 함으로써 훗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18. 신라 말에는 경전과 불상을 모두 금(金)과 은(銀)으로 만들어서 그 사치함이 도를 지나쳤기 때문에 끝내는 멸망하여 장사치들로 하여금 불상을 훔치고 훼손하여 서로 사고팔아 생계를 이어 갔는데, 근래에도 그 남은 풍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엄중히 금지하셔서 그 폐단을 개혁하시기 바랍니다.

  19. 여러 차례 내려진 은혜를 따라서 공신(功臣)들의 등급에 맞게 그들의 자손들을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또 경자년(940)의 전과(田科) 배분과 삼한(三韓)의 통일 이후에 입사(入仕)한 자들도 또한 헤아려 품계와 관직을 내려준다면 억울한 누명을 풀어 재해가 발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20. 불법(佛法)을 존숭하고 믿는 것이 비록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왕과 일반 백성들이 공덕(功德)을 쌓는 것은 그 방법이 실로 같지 않습니다. 제왕의 경우는 곧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제왕은 그러한 점을 깊이 생각하여 일마다 모두 적절함을 헤아려서 폐해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겨울과 여름에 열리는 강경회(講經會)와 선왕(先王) · 선후(先后)의 기일재(忌日齎)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취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지만, 그 나머지 것들은 줄이시기 바랍니다.

  21. 우리 조정의 주22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는 오히려 법식에 맞지 않는 것이 여전히 많은데도 주23에 지내는 제사와 성수(星宿)에 지내는 주24는 그 번잡함이 도를 넘어섰으니,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그 노동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의 힘을 쉬게 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한다면 그 복이 반드시 빌어서 받는 복보다 클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별도로 올리는 기도와 제사를 없애고, 항상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자신을 나무라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하늘을 감동시킨다면 재해는 저절로 사라지고 주33은 저절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22. 우리 조정의 주25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거니와, 우리 태조께서 창업하신 초기에 여러 신하들 중 본래부터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자를 제외한 나머지 본래부터 소유하지 않았던 자들은 혹은 군대를 따라 전쟁에 나가서 포로를 얻거나, 혹은 재물로 사서 노비로 삼았습니다. 성상께서는 전날의 일들을 깊이 비추어 보아서 천한 자들이 귀한 이들을 능멸하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의 본분에 있어서 그 중도(中道)를 잡아 처리하십시오. 대개 관직이 높은 자들은 도리를 알기 때문에 법에 어긋나는 일이 드물며, 관직이 낮은 자들은 진실로 그 지략이 교묘한 방법으로 잘못을 덮을 만하지 않고서야 어찌 양민(良民)을 천민(賤民)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직 지금의 판결을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는 데에 힘쓰시되, 앞선 조정에서 결정한 바는 거슬러 따져서 분란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최승로의 「시무28조」는 새 국왕(성종)이 해야 할 당면 과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건의이다. 최승로는 그 당시 고려왕조가 당면한 문제에 관해서 대내외적으로 광범위하게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의 폐단과 사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불교 비판

불교에 대한 태도가 비판적이었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그의 불교 비판은 교리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파생된 폐단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첫째는 종래의 불교 의식을 그대로 행하고 있던 성종에 대한 간언으로, 2·4·8조에서 모두 성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과도한 불교 행사를 꾀했던 광종의 주26와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는 성종이 불선(不善)의 표본처럼 여겨지던 광종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불교로 인한 사회적 폐단에 대한 비판이었다. 6·10·16·18조가 이에 해당된다. 특히, 18조에서는 신라의 멸망이 불경 · 불상 등에 금, 은을 쓰는 등 사치가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조목에 걸쳐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정치 개혁을 실현하려면 성종이 지나치게 불교에 몰두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성종이 재위 동안에 여러 가지 유교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펴 나가게 된 것도 최승로의 이와 같은 정책 건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민생 문제

「시무28조」에서 최승로가 역점을 둔 정책은 민생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민중들이 집권층 · 주27 · 지방 호족세력(豪族勢力) 등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 여러 조목에서 구체적인 시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6조에서 불보 · 전곡의 폐단을 시정해야 될 이유로 백성의 노요(勞擾)를 들고 있으며, 7조에서는 지방관의 파견을 건의하는 이유를 향호(鄕豪)가 매번 공무를 빙자해 백성을 괴롭히므로 백성들이 그 명을 견딜 수 없는 실정 때문이라고 하였다. 10조에서의 승려의 역관 유숙 금지 건의도 민폐가 초점이 되고 있으며, 13조의 연등 · 팔관회 규모 축소 건의도 민중을 널리 징발해 노역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28조 중 현재 전하는 22개 조목에서 민폐의 시정과 민역(民役)의 감소 등 민생 문제와 관련되는 것은 4·6·7·10·12·13·15·16·17·20·21조 등 모두 11조에 걸쳐 있다. 특히, 21조에 보이는 “민력(民力)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으면 그 복은 반드시 기도하는 바의 복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민생의 안정이 곧 정치적 · 사회적 안정과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3) 사회 제도

이 밖에도 최승로는 신라 말 이래 문란해진 복식제도(服飾制度) · 신분제도(身分制度) 등의 정비에도 관심을 보였다. 9·17·22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정비 기준을 한결같이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데에 두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러한 면은 새로운 사회 현실에 대응하는 개혁책을 제시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탈피할 수 없었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최승로가 지향한 사회 개혁의 목표는 전래의 가치관에 토대를 둔 제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 대외 관계

대외적인 면에서 중국 관계를 5조와 11조의 2조목에 걸쳐 다루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광종의 지나친 주28적(慕華的)인 태도에서 빚어진 혼란을 반성하고, 이제부터는 중국에 대해 긍지와 독자성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11조에서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의 현실에 알맞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5) 군주관

「시무28조」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조목은 14조로서, 여기에서는 군주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최승로는 「5조치적평」에서 군주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제시한 바 있었는데, 이 조목에서 다시 군주가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 개혁의 성공 여부는 군주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로 더욱 삼가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접함에 공손함을 생각하며, 혹 죄 있는 자가 있더라도 죄의 경중을 모두 법대로만 논한다면 곧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14조의 끝말은 이런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시무28조」의 개혁 내용은 성종을 크게 공감시켜, 성종에 의해 추진된 일련의 국가 체제 정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앙 정부는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牧)을 설치하였으며 상주하는 외관(지방관)을 파견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 행사가 억제되어 팔관회는 폐지되고 집을 절로 삼는 것도 금지되었다. 아울러 국자감(國子監)을 중수하고 12목에는 경학박사(經學博士)를 파견하는 등 유학(儒學) 교육을 진흥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고려 사회를 귀족 중심의 안정된 국가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사료는 바로 그러한 고려의 중앙 통치 이념과 체제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시무28조」는 고려 초기의 새로운 정책 수립자이며 정치 담당자였던 최승로의 정치사상(政治思想)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의 하나가 되고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편찬자들에게도 소중한 자료로 여겨졌다. 그것은 『고려사』 열전(列傳) 최승로전에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선거지(選擧志) 전주조(銓注條), 병지(兵志) 숙위(宿衛) · 진수조(鎭戍條), 형법지(刑法志) 노비조(奴婢條) 등에도 해당 시무 조항이 실려 있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밖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국통감(東國通鑑)』 · 『동문선(東文選)』 ·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도 실려 있는 것을 볼 때 자료로서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사강목(東史綱目)』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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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용필, 「최승로 불교 이해의 진면모: 수신론·공덕론」(『한국사학사학보』 37, 한국사학사학회, 2018)
노용필, 「최승로의 「오조정적평」 서술과 ‘위난’ 의식」(『한국사학사학보』 44, 한국사학사학회, 2021)
박재우, 「고려 최승로의 정치사상과 그 지향」(『한국중세사연구』 58, 한국중세사학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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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최승로의 정치사상」(『산운사학』 3, 산운학술문화재단, 1989)
정성식, 「최승로의 유불관 탐구: 시무 28조를 중심으로」(『한국철학논집』 26, 한국철학사연구회, 2009)
장일규, 「최승로의 유교적 정치이념과 최치원 추숭」(『한국사상과 문화』 21,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하현강, 「고려초기 최승로의 정치사상연구」(『이대사원』 12, 이대사학회, 1975)
주석
주1

그 당시의 정치나 행정에 관한 일. 우리말샘

주2

얻음과 잃음. 우리말샘

주5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 우리말샘

주6

대장을 돕는 한 방면의 장수. 우리말샘

주7

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우리말샘

주9

임금이나 국가의 명령을 받고 외국에 사절로 가는 신하. 우리말샘

주10

약자가 강자를 섬김. 우리말샘

주11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냄. 우리말샘

주12

삼보(三寶)의 하나로, 석가모니불과 모든 부처를 높여 이르는 말. 부처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또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므로 세상의 귀중한 보배와 같다 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샘

주13

지방의 관직이나 관원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6

모든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17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우리말샘

주18

몹시 괴롭고 힘들게 일함. 또는 그런 노동. 우리말샘

주19

부처를 모신 집. 우리말샘

주20

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절도사, 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따위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21

착한 일을 하여 쌓은 업적과 어진 덕. 우리말샘

주22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 우리말샘

주23

높고 험준하게 솟은 산들. 우리말샘

주24

무속 신앙이나 도교에서,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 우리말샘

주25

양민과 천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6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정하여진 규칙이나 관례. 우리말샘

주27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우리말샘

주28

중국의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함. 우리말샘

주29

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 우리말샘

주30

침범하여 포학하게 행동하다. 우리말샘

주31

그 지방의 풍속이나 습관. 우리말샘

주32

고려 시대에, 외빈(外賓)의 접대를 맡아보던 관아. 태조 초기에 둔 것으로, 문하성에서 외빈을 접대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없어졌다. 우리말샘

주33

타고난 복과 벼슬아치의 녹봉이라는 뜻으로, 복되고 영화로운 삶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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