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도총관, 강릉부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성여(聖與)
시호
충경(忠景)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30년(중종 25)
사망 연도
1601년(선조 34)
본관
평산(平山)
주요 관직
정언|장령|집의|의주목사|승지|형조참판|도총관|강릉부사|판의금부사
관련 사건
기묘사화
정의
조선 중기에, 도총관, 강릉부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與). 신영석(申永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원(申湲)이고, 아버지는 신정미(申廷美)이다. 어머니는 학성군(鶴城君) 이련(李連)의 딸이다. 큰아버지 신순미(申順美)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569년(선조 2) 정언(正言)이 되었다.

장령(掌令)·수찬·사간·교리·부교리·부응교 등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경연관(經筵官)으로 입시하여 기묘사화 때에 피화된 인물들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회복시킴)에 노력하였다.

1578년(선조 11) 집의(執義)가 되어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 강화를 건의하는 등 대간으로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584년(선조 17) 충청도·경기도 감목관(監牧官)이 되어 마정(馬政)을 순시하고 수령을 규찰하였다.

이 때 전라도 전세선(田稅船)이 안흥량(安興梁)에서 일이 빈번하여 세곡과 인명 손실이 막대함을 알고, 이의 시정을 위하여 항로의 개척과 주위에 창고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 뒤 의주목사·강원감사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연경(燕京)에 체류하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알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도움을 받아 병부와 예부에 계속 아뢰어 위급함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에 의한 요동병(遼東兵) 3,000명의 파견이 있게 되었다.

곧 귀환하여 승지·부호군·동지중추부사·병조참의·호조참의·형조참판·형조판서·지중추부사·도총관·동지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전란의 타개에 진력하였다. 1597년(선조 30) 강릉부사로 혜정(惠政: 은혜로운 정치)을 베풀다가 순검사(巡檢使)가 되어 축성을 담당했고, 이어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되고, 평성부원군(平星府院君)에 봉해졌다. 평소 성질이 탐비(貪鄙: 탐욕스럽고 비루함)하여 취렴(聚斂: 재산을 착취하여 모음)에 힘썼다는 사신(史臣)의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예제(禮制)에 밝아 조선 전기 이래 복상시 때 입(笠)에 대한 정해진 제도가 없었는데, 경연에서 백포립(白布笠)을 쓸 것을 건의하여 그 뒤 준용되었다고 한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대동야승(大東野乘)』
『호보(號譜)』
집필자
장동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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