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 한 때 양희지(楊稀枝)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양미(楊渼)이고, 아버지는 군수 양맹순(楊孟淳)이며, 어머니는 직장(直長) 정시교(鄭是僑)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생원 ·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1464년에 동료 유생들과 함께 세자가 추진하는 원각사(圓覺寺) 개창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편전에서 성종을 알현했을 때 왕으로부터 희지라는 이름과 정부(楨父)라는 자(字)를 받았다.
이 해 검열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고, 1476년부터 3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77년 저작(著作) · 박사를 거쳐,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에 올라 경연관을 겸직했고, 이어서 교리(校理) · 문학 · 검상을 역임하였다. 1483년 정희왕후(貞喜王后)의 상을 당해 산릉도감낭첨(山陵都監郎廳)을 맡아 이를 잘 처리하였다.
이어 1487년 예조좌랑,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489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 뒤 1494년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497년 직제학이 되었다. 1498년 좌부승지, 1499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바로 사직하였다.
1500년에 다시 부총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박림종(朴林宗) 등을 구하기 위해 소를 올렸다가 우의정 성준(成俊)의 배척을 받았다. 그리고 왕으로부터 임사홍(任士洪)의 당여로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로 지목받아, 익산에 부처되었다. 1502년에 죄가 풀려 동지중추부사로 서용되고 겸세자우부빈객(兼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이듬해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고 재주가 있었으나 임사홍 · 유자광(柳子光) · 노공필(盧公弼) 등과 친하고, 임금의 뜻만 맞추려 하는 등 출처(出處)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대봉집』이 있다. 대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