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기(永奇, 1820~1872)는 호는 남호(南湖)이고 법명은 영기(永奇)이다. 영기는 1820년(순조 20) 전라도 고부(古阜, 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일부와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일부를 포함한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정언규(鄭彦圭)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14세에 철원 보개산(寶盖山) 심원사(深源寺) 지장암에서 출가하였다.
영기는 1852년(철종 3)에 삼각산(三角山) 내원암(內院庵)에서 한 글자를 쓸 때마다, 부처의 명호를 세 번 부르고 세 번 절을 하며 필사한 『요해아미타경(要解阿彌陀經)』을 간행하였다. 이어서 『십육관경(十六觀經)』과 『연종보감(蓮宗寶鑑)』을 간행하여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 보관하였다.
영기는 1855년(철종 6)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화엄경소초(華嚴經疏초)』 90권과 『준제천수합벽(準提千手合璧)』 1권, 『천태삼은시집(天台三隱詩集)』 1권 등을 간행하고, 판전(版殿)을 새로 지어 봉안하였다. 당시 편액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원래 『화엄경소초』는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 1681년(숙종 7) 중국의 표류선에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을 구해 낙안(樂安) 징광사(澄光寺)에서 복각했던 것으로, 1770년(영조 46) 화재로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774년(영조 50)부터 설파 상언(雪坡常彦, 17071791)이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서 가흥대장경을 다시 간행하였다. 그러나 잦은 인쇄로 인해 마모가 심했을 뿐 아니라, 목판이 서울에서 먼 곳에 있어 인쇄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화엄경소초』를 새롭게 간행하여 봉은사에 안치했던 것이다.
1860년(철종 11) 영기는 철원 보개산의 석대암(石臺庵)을 중건하고 『지장경(地藏經)』과 『관심론(觀心論)』을 판각하였다. 또 강화도에서 수륙무차대회(水陸無遮大會)를 주관하였다. 1865년(고종 2) 해인사의 대장경 2질을 인쇄하여 설악산 오세암(五歲庵)과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봉안한 뒤 200일 동안 기도하였다. 1872년(고종 9) 철원 심원사(深源寺)의 세 전각과 정선 정암사(淨巖寺)의 갈래보탑(葛來寶塔)을 다시 짓고, 같은 해 9월 20일에 입적하였다.
영기는 죽기 전, “육신을 숲 속에 던져 배고픈 짐승들이 뜯어 먹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유언하였으나, 제자들이 아무 대답이 없자 크게 탄식하면서 “국풍(國風)이로다.”하고 숨을 거두었다. 세속 나이 52세, 승랍은 39세였다. 비는 서울 봉은사 비림(碑林)에 있으며, 제자로는 석정(奭淨), 두흠(斗欽), 유계(宥溪) 등이 있다.
영기가 남긴 불교가사로는 「광대모연가」와 「장안걸식가」가 전한다. 「광대모연가」의 원래 제목은 ‘대방광불화엄경판각광대모연가’로, 90권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화엄경소초』를 간행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연문(募緣文)을 가사의 형태로 창작한 것이다. 이 불교가사는 서사(1구68구), 본사(69구130구), 결사(131구~156구) 총 156구로 이루어져 있다. 386구의 「장안걸식가」는 서울 장안의 모든 군상들이 미망에 사로잡힌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청정하게 걸식하는 행위는 자성을 깨치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