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은 공무로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 등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로 고려시대 이래 불교와 깊이 연관되었다. 조선에서는 원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운영하고자 하였다.
고려시대 사찰이 그대로 원이 된 사실이 확인되는 가운데, 조선 초기까지 원의 건립 및 운영은 승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원의 보수 및 관리를 승려에게 그대로 맡겨 원 경영에 실적이 있는 승려에게는 도첩(度牒)을 주는 방향으로 제도화하였다. 동시에 지방에서는 수령이, 서울의 성저(城底)에서는 5부(五部)에서 부근의 민을 모집하고 원주(院主)를 정하여 원우(院宇)를 수리하게 하며, 각각 관찰사와 한성부가 관리 · 감독하게 하였다.
원전은 원을 운영하기 위한 재정적 기반으로서 지급하였는데, 고려 말 전제 개혁 때부터 등장하여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성문화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원의 위치에 따라 원전의 규모는 대로(大路) 2 결, 중로(中路) 1결 50 부, 소로(小路) 1결로 정해졌다.
1445년(세종 27)에 국용전제가 시행되며 원전은 대로 1결 50부, 중로 1결, 소로 50부로 축소되었고 모두 원 근처의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경국대전』에서 원전은 직접 경작하고 국가에 세를 바치지 않는 ‘자경무세(自耕無稅)’의 토지로 규정되었다. 토지 면적은 더욱 축소되어 대로 1결 35부, 중로 90부, 소로 45부로 규정되어 지속되었다.
원전의 지급 대상은 호(戶) 단위로 선정되는 원주였다. 원전은 지급 대상을 강조하여 원주전(院主田), 원주위전(院主位田)이라고도 일컬어졌다. 『경국대전』에서는 원주에게 대로 5호, 중로 3호, 소로 2호를 지급하도록 규정되었고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었다. 아울러 원주는 동거하는 친족 중 3인을 다른 역에 정하지 않도록 하는 급보(給保) 원칙을 적용받았다.
16~17세기에 전란을 거치며 원은 거의 소멸하여 갔다. 영남대로(嶺南大路)의 경우 15세기 무렵 17개 군현에 165개의 원이 존재하였지만 17세기 중엽에는 32개로 줄어들었고 18세기 말에는 20여 개만 남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원이 거의 사라지면서 원전 역시 더 유지되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