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李采)는 조선 후기에 상주목사, 황주목사, 경주부윤, 승지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손자이다. 이재는 여흥민씨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의 조카로서, 노론의 핵심 집안으로 분류된다. 이채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780년까지 호조정랑, 돈녕부 주부, 음죽현감으로 활동하였으나, 1780년 이후로는 주로 향리에 머물며 학문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부 이재의 문집인 『도암집(陶菴集)』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본관은 우봉(牛峯, 지금의 황해도 금천),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다. 아버지는 대사간 이제원(李濟遠)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 홍중복(洪重福)의 딸이다. 이재의 조부는 우의정을 지낸 이숙(李䎘)이고, 부친은 이만창(李晚昌)인데, 모친이 여흥 민씨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므로 인현왕후와 자매 사이가 된다. 이 때문에 이재 집안은 노론의 핵심 집안으로 분류된다.
이채는 1752년(영조 28)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1763년(영조 39)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부인 양주 조씨 조영순(趙榮順)의 딸 사이에서 광문(光文) · 광정(光正)의 두 아들과 황기찬(黃基瓚)과 박제현(朴齊賢), 김병규(金炳珪)와 혼인한 세 딸을 두었다. 측실에서도 광시(光始) · 광세(光世)의 두 아들과 김운순(金芸淳)과 혼인한 딸을 두었다.
1745년(영조 21)에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774년(영조 5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1775년(영조 51)에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호조좌랑, 사헌부 감찰, 호조정랑, 돈녕부 주부에 올랐다.
1780년(정조 4)에 음죽현감이 되었다가 잘못된 형 집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과거 공부를 중단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지례현감에 제수된 이후 선산부사, 상주목사, 충주목사, 나주목사, 황주목사 등 외직을 맡았다.
순조 대에도 여주목사, 풍천부사, 경주부윤 등 외직과 좌 · 우 부승지 등 승지에 자주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향리에서 조부의 문집인 『 도암집(陶菴集)』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20년(순조 20)에 타계하자 충주 족자동(簇子洞)에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