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정조 13)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1798년(정조 22) 식년 문과에서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1798년 3월,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 5월 선릉 직장(宣陵直長)에 제수되었으나, 정조 사후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영천에서 경사를 깊이 탐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1816년(순조 16) 이조정랑, 1817년(순조 17)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1822년(순조22)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학교 교육과 백성 교화에 힘썼으며 백성들의 폐막(弊瘼)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1824년에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자 1825년(순조 25) 상소를 올려 주자의 「기유봉사(己酉封事)」와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를 강학의 요체로 삼을 것과 백골징포 등 부당한 군포 징수를 없애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백성들을 돌보는 정치라고 주장하여 순조의 넉넉한 비답을 받았다. 1836년(헌종 2 )에는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1842(헌종 8) 사망하였다.
박시원은 소고 박승임과 퇴계 이황을 사표로 받들며, 강학에 힘썼다. 같은 고향 사람인 이인행(李仁行)과 함께 이산서원(伊山書院)의 학름(學廩)을 정비하고 매년 가을과 겨울에 『주서(朱書)』 · 『근사록(近思錄)』 · 『심경(心經)』 등을 통독함으로써 서원의 옛 규정을 회복하였다.
저서로는 1853년 아들 박종교(朴宗喬)와 영천 사림들이 간행한 8권 4책의 『일포집(逸圃集)』이 전한다. 권 1부터 권 7까지 시, 만사, 상소문, 서간문, 잡저, 서문, 기문, 잠(箴), 명(銘), 발문, 제문, 축문, 묘갈명, 행장, 상량문, 유사 등 저자의 학문과 뛰어난 문장력을 알 수 있는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권8은 부록으로 1846년 유치명(柳致明)이 지은 행장, 강필효(姜必孝)가 지은 묘갈명, 기타 벗들이 지은 제문과 만사, 장남 박종교가 지은 가장(家狀)이 있다. 마지막에는 이휘녕(李彙寧)이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