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23대 국왕인 순조와 순원왕후 안동김씨의 합장 단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합장릉|단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순조|순원왕후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곡동, 헌인능관리사무)
내용 요약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국왕인 순조와 순원왕후 안동김씨의 합장 단릉이다. 1834년 파주에 조성된 순조 인릉은 1856년 현재 자리로 천릉되었으며, 이 자리는 세종 옛 영릉 자리이다. 순조 인릉을 새로 조성하면서 옛 영릉과 인근의 장경왕후 옛 희릉 돌거리가 재사용되었다. 사적으로 서울 헌릉과 인릉 내에 있다.

정의
조선 제23대 국왕인 순조와 순원왕후 안동김씨의 합장 단릉.
건립경위

1834년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가 승하하자 인릉은 파주의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장릉(長陵)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1855년 인릉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1855년에는 익종(翼宗, 1809~1830) 수릉(綏陵)과 수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 휘경원(徽慶園)의 천봉이 결정되어 인릉의 천릉은 1856년으로 미루어졌다.

1856년 인릉의 새로운 자리가 결정되었는데,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헌릉(獻陵) 오른쪽 언덕으로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의 옛 영릉(英陵) 자리였다. 이곳에서 옛 영릉의 주1, 주2 등의 돌거리들이 발굴되었으며, 이 작품들은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를 위해 1446년 제작되었다.

또 인근에 있던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옛 희릉〔舊禧陵, 1515년 조성〕 자리에서도 옛 돌거리들이 발견되었으며, 이 돌거리들 중 쓸 수 있는 것을 인릉에 재사용하였다.

1857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승하 후 능호는 문릉(文陵)으로 결정되었으나, 인릉에 합장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순원왕후는 순조 인릉 왼쪽에 합봉(合封)되었으며, 봉분이 하나인 단릉(單陵)으로 조성되었다. 순원왕후 합봉 시 봉분의 크기가 커지면서 면전석(面磚石), 주3의 크기가 달라져 새로 제작하였다. 그 외의 돌거리는 다시 제작하지 않았으며, 표석만 갈아서 다시 새겼다.

형태와 특징

인릉은 단릉에 난간석(欄干石)을 두르고 주4, 주5, 주6, 주7, 장명등(長明燈), 문석인, 무석인, 주8 등을 건립하였다. 능강 아래에는 주9과 비각(碑刻), 주10 등이 건립되어 있다.

금석문

비각 안에 표석은 2기가 있다. 1834년 건립, 순조 인릉 표석을 갈아서 다시 세운 1857년에 건립한 합봉 표석은 앞면의 전서(篆書)는 김병국(金炳國, 1825~1905)이 쓰고, 뒷면의 음기(陰記)는 박회수(朴晦壽, 1786~1861)가 짓고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썼다.

1900년에 순조와 순원왕후를 숙황제(肅皇帝)와 숙황후(肅皇后)로 추숭하고 건립한 표석은 앞뒷면의 글씨를 모두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썼다.

의의 및 평가

인릉은 1446년 제작의 옛 영릉, 1517년 제작의 옛 희릉 돌거리가 재사용된 곳으로, 조선왕릉 중 두 곳의 돌거리가 재사용된 유일한 사례이다. 15세기, 16세기, 19세기 작품들의 양식이 혼재해 있으며, 사적으로 서울 헌릉과 인릉(서울 獻陵과 仁陵) 내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순원왕후(純元王后)〕인릉산릉도감의궤(仁陵山陵都監儀軌)』
『〔순조(純祖)〕인릉산릉도감의궤(仁陵山陵都監儀軌)』
『〔순조(純祖)〕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仁陵遷奉山陵都監儀軌)』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Ⅷ』(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논문

김민규, 「조선 왕릉 장명등 연구」(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9)
주석
주1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2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3

돌 난간의 기둥 사이에 동자석을 받쳐서 건너지른 돌.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6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7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8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9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0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