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가 승하하자 인릉은 파주의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장릉(長陵)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1855년 인릉의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며, 1855년에는 익종(翼宗, 18091830) 수릉(綏陵)과 수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 휘경원(徽慶園)의 천봉이 결정되어 인릉의 천릉은 1856년으로 미루어졌다.
1856년 인릉의 새로운 자리가 결정되었는데,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 헌릉(獻陵) 오른쪽 언덕으로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의 옛 영릉(英陵) 자리였다. 이곳에서 옛 영릉의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 등의 돌거리들이 발굴되었으며, 이 작품들은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를 위해 1446년 제작되었다.
또 인근에 있던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옛 희릉〔舊禧陵, 1515년 조성〕 자리에서도 옛 돌거리들이 발견되었으며, 이 돌거리들 중 쓸 수 있는 것을 인릉에 재사용하였다.
1857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승하 후 능호는 문릉(文陵)으로 결정되었으나, 인릉에 합장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순원왕후는 순조 인릉 왼쪽에 합봉(合封)되었으며, 봉분이 하나인 단릉(單陵)으로 조성되었다. 순원왕후 합봉 시 봉분의 크기가 커지면서 면전석(面磚石), 죽석(竹石)의 크기가 달라져 새로 제작하였다. 그 외의 돌거리는 다시 제작하지 않았으며, 표석만 갈아서 다시 새겼다.
인릉은 단릉에 난간석(欄干石)을 두르고 양석(羊石), 호석(虎石), 망주석(望柱石),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문석인, 무석인, 석마(石馬) 등을 건립하였다. 능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刻), 홍살문 등이 건립되어 있다.
비각 안에 표석은 2기가 있다. 1834년 건립, 순조 인릉 표석을 갈아서 다시 세운 1857년에 건립한 합봉 표석은 앞면의 전서(篆書)는 김병국(金炳國, 18251905)이 쓰고, 뒷면의 음기(陰記)는 박회수(朴晦壽, 17861861)가 짓고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썼다.
1900년에 순조와 순원왕후를 숙황제(肅皇帝)와 숙황후(肅皇后)로 추숭하고 건립한 표석은 앞뒷면의 글씨를 모두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썼다.
인릉은 1446년 제작의 옛 영릉, 1517년 제작의 옛 희릉 돌거리가 재사용된 곳으로, 조선왕릉 중 두 곳의 돌거리가 재사용된 유일한 사례이다. 15세기, 16세기, 19세기 작품들의 양식이 혼재해 있으며, 사적으로 서울 헌릉과 인릉(서울 獻陵과 仁陵) 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