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도승지, 예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극념(克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9년(광해군 1)
사망 연도
1686년(숙종 12)
본관
초계(草溪)
주요 관직
공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예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극념(克恬). 종영(宗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혹(㷤)이고, 아버지는 기숭(基崇)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헌납 등을 지냈다. 1664년(현종 5) 정언으로 호조판서 부재 중에 사안을 처리한 뒤 책임을 판서에게 돌린 호조참판 이행진(李行進)을 논핵하는 데 동조하였다가 체직되었고, 사냥시에 관노를 많이 거느리고 행패를 부린 종실을 탄핵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폈다.

1666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와 청의 사정을 상세히 국왕에게 보고하였으나 청나라에서의 비행과 경솔한 행동이 드러나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이 후 승지로 승진하여 서인의 공격으로 향리에 물러난 허적(許積)에게 소환을 요구하는 국왕의 교지를 여러차례 전달하였다.

1672년 허적을 비난하고 송준길(宋俊吉)과 이상(李翔)의 서용을 주장하는 이민적(李敏迪)의 상소로 국왕과 대간이 대립할 때 대간의 상소를 봉입한 죄로 하옥되었다. 1678년(숙종 4) 도승지로 좌의정 권대운(權大運)과 함께 청 사신을 맞으러 나갔다.

1680년 예조참판으로 상소하여 천하의 일은 성실에서 이뤄진다고 전제하고 국왕에게 성실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1683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송시열(宋時烈)이 제기한 태조의 추상존호(追上尊號)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신중론을 견지하였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이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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