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으로, 초명은 정분(鄭奮)이며 자는 화경(和卿)이다. 형부상서 정세유(鄭世裕)의 손자로, 평장사 정숙첨(鄭叔瞻)의 아들이며, 최우(崔瑀)의 조카이다. 하동정씨는 최씨정권을 지탱하게 해 주었던 4대 가문, 곧 경주김씨·철원최씨·정안임씨·하동정씨 중에 하나로서 최씨정권기 명문 벌족이었다.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음양·산술·의약·음률에도 정통하였다. 진양의 수령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하동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권자 최우의 추천으로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고 1241년(고종 28)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였다. 최우의 정방원(政房員)으로서 정안의 권세가 조야를 기울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최우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남해(南海)로 은퇴하였다.
불교를 독신하여 명산대찰을 순방하고 사재를 희사하여 당시 간행 중이던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펴내기도 하였는데, 정안이 있던 남해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팔만대장경』의 조판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은퇴 후에도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며 사치를 좋아하여 저택·기명 등이 매우 호화로웠다. 최우가 죽고 최항(崔沆)이 집권하자 1251년에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어느날 문생인 낭장 임보(林葆), 내시 이덕영(李德英), 함주부사 석연분(石演芬) 등과 시사를 논할 때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비판하다가 그 말이 알려져 가산은 적몰되고 백령도에 귀양갔다가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