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봉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 명종~선조 대 남양부사, 괴산군수, 여주목사 등을 역임한던 문신.
이칭
흠중(欽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8년(연산군 4)
사망 연도
1575년(선조 8)
본관
남양(南陽)
주요 관직
괴산군수|여주목사
내용 요약

홍봉세는 조선 전기 명종~선조 대 남양부사, 괴산군수, 여주목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조광조의 제자로, 신진 사류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기묘사화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40세가 되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고을에서 수령 직을 역임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을 때 많은 선비가 외면하였지만, 그는 찾아가서 곡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의
조선 전기 명종~선조 대 남양부사, 괴산군수, 여주목사 등을 역임한던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홍봉세(洪奉世)는 1498년(연산군 4)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흠중(欽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원주판관(原州判官)을 지낸 홍정(洪淀),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홍임(洪任)이다. 아버지는 공조판서를 지낸 홍경림(洪景霖)이다. 그는 중종 즉위 당시의 공적을 인정받아 정국훈(靖國勳)에 주1되었다. 이후 익원군(益原君)에 봉해졌다. 어머니는 함양여씨(咸陽呂氏)이다.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 박승약(朴承爚)의 손녀이다.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조광조 밑에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형제 등과 교유하며 함께 공부하였다.

주요 활동

관직에 나아가려 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0세가 되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올랐다. 이후 남양과 춘천에서 부사를 역임하였다. 수령만 여덟 차례 맡았으며 마지막에는 괴산군수와 여주목사를 지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는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를 많이 미워했던 권력자들이 옥졸들을 통해서 조광조를 괴롭히고자 하였는데, 뇌물을 써서 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죽어 용인(龍仁)으로 옮겨질 때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다른 선비들이 외면하였지만, 홍봉세는 가서 곡을 하였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홍봉세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주축 중 한 명이었던 홍경주(洪景舟)의 조카였다. 명종 대 주2으로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에 임명되었는데, 천재지변으로 국왕이 주3)하고 있는 와중에 관원들을 불러 연회를 열어서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75년(선조 8) 78세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방목(國朝榜目)』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성종실록(成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예종실록(睿宗實錄)』
『용재집(容齋集)』
『해동잡록(海東雜錄)』
주석
주1

벼슬아치에게 일 년 또는 계절 단위로 나누어 주던 금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쌀, 보리, 명주, 베, 돈 따위이다.    우리말샘

주2

고려ㆍ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우리말샘

주3

나라에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고가 있을 때에, 임금이 몸소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던 일.    우리말샘

집필자
이규철(성신여대 교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