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98.4㎝, 가로 402.5㎝. 삼장보살도는 천장보살 · 지지보살 · 지장보살을 하나의 화폭에 그린 수륙재 불화이다. 고종대 권세가였던 민씨가문 민영휘(閔泳徽)의 부친 민두호(閔斗鎬)가 춘천부유수(春川府留守) 자리에 있을 때 시주를 하여 1892년에 완성하였다. 5명의 화승들이 봉은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장보살도와 함께 삼세불도, 감로도를 13일 만에 그렸다. 원래 대웅전 오른쪽 벽에 신중도(1844년)와 함께 걸려 있었는데 현재는 후불벽 뒷면에 걸려 있다.
가운데에 천장보살과 천선중(天仙衆)이 자리하고 향우측에 지지보살과 지기중(地祇衆)이, 향좌측에 지장보살과 명부중(冥府衆)이 배치되었다. 성중 상호는 원만하다. 구성은 짜임새 있으며 도상은 전통에 충실하였다. 반면 붉은색 비중이 크고 청색이 짙은 것은 이 시기 다른 불화와 같다.
고종대 경상남도 지역 삼장보살도에서 보살의 수인과 복식이 제각각 변형되는 것과 비교할 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도상을 잘 지켰다. 이를 통해 다른 지역에서는 조선 후기의 전형 도상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었지만 경기 지역은 기존 전통을 어느 정도 지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지보살이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으로 가사를 두 벌 입은 것은 복식의 중요한 변화이다. 지장보살 역시 가사를 이중착의법으로 입었고 자세는 유희좌(遊戱坐)와 비슷한데 그 결과 왼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듯하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모두 두광을 하지 않은 것은 지지보살의 좌우협시와 균형을 맞춘 것이지만 두광 본래 의미를 생각한다면 옳은 방법은 아니다. 좌우대칭이라는 형식에 집착한 결과이다. 시왕들이 머리에 쓴 관과 손에 든 홀의 금박이 화려하다. 이렇게 금박을 많이 쓴 불화가 없는데 왕실 원찰의 사격과 시주자의 능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당대 일급 화원들이 참여하여 지금까지 가장 거대한 규모로 짧은 시간에 완성한 작품으로 같은 시기 경상남도 지역 삼장보살도와 비교하면 수준이 높다. 조선 후기 삼장보살도의 기본을 유지하면서 조선 말기 경상남도 지역에서 일어난 특징인 신중도와의 결합 방식을 일부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