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약의 본관은 삭녕(朔寧)으로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광역시 동래 지역) 출신이다. 최천약은 자료에 최천약(崔天躍, 崔千若, 崔千約) 등과 같이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최천약(崔天若)이 정확하다.
그의 선대와 부인의 이름, 묘소의 위치는 알 수 없고, 후손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사상면 호적 중초(沙上面戶籍中草)』,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 등에 아들 최야곤(崔也崑)과 8세손 최두봉(崔斗鳳, 1869~) 등이 기록되어 있다. 최야곤의 관직은 알 수 없지만, 최두봉은 부산부 사상면 괘법동 7통 9호에 거주하였는데, 향교장의(鄕校掌儀)와 도유사(都有司) 등을 역임하였다.
최천약은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무임선생안(東萊武任先生案)』, 『장관청선생안(將官廳先生案)』 등에 무인(武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신 신분은 평민으로 추정된다. 그는 1711년(숙종 37) 신묘사행(辛卯使行) 때 반전차지(盤纏次知)로 일본 사행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또 그는 1713년(숙종 39)에 허원(許遠)을 따라 관소(關所)와 의주(義州)에 가서 천문의기의 제작 기술을 배웠고, 1730년(영조 6) 청(淸)나라 동지사(冬至使) 사행단 때는 벽돌 굽는 법, 천주당(天柱堂), 측후(測候)의 일을 배우기 위해 사신단의 일원으로 갔다 왔다. 최천약은 이렇게 일본과 청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배웠다.
그는 1718년(숙종 44)에 단의빈(端懿嬪, 16861718) 옥인 조성, 1721년(경종 1)에 왕세제(王世弟) 옥인 조성 등의 각종 일에 동원되었다. 1731년(영조 7)에 원릉(園陵)의 천릉(遷陵) 일에 동원되어 그 공로로 화량(花梁)첨사에 제수(詹事)되었고, 1735년(영조 11)에 장릉(長陵)의 수도(水道) 일을 담당하였다. 그 후에도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온릉(溫陵) 석물(石物) 감동(監董), 의소 세손(懿昭 世孫, 1750~1752)의 의령원(懿陵園) 석물 감동, 개성(開城)의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절개비(節槪碑) 건립 때 각수(刻手)로 참여하였다.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1752년(영조 28)에는 그해 죽은 귀록 조현명(歸鹿趙顯命)의 무인석(武人石)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최천약은 왕실과 나라의 중요한 일을 담당하였다.
최천약은 자명종을 만드는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경성의 홍수해(洪壽海),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석당 나경적(石塘 羅景績)과 함께 자명종을 만드는 대표적 인물로 최천약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을 가지게 된 것은 동래 지역의 왜관(倭館) 출입과 일본, 청을 방문한 덕분인 듯하다. 그러한 소문은 영조(英祖)에게 알려져 영조는 그를 편전(便殿)에 불러서 자명종의 시계를 보여주고 만들게 하였고, 영조가 그가 만든 자명종을 보고 감탄을 할 만큼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 1740년(영조 16)에 척도(尺度)의 문란이 나타나자, 유척기(俞拓基)는 삼척부(三陟府, 현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에 있는 1446년(세종 28)에 만든 포백척(布帛尺)으로 황종척(黃鍾尺)을 비롯해 국가의 기준 척(尺)을 최천약에게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영조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를 고려하면 최천약은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최천약은 1741년(영조 17)에 침구의 기술을 익히는데 중요한 침구동인을 제작하였고, 또 영조가 세종 대의 보루각(報漏閣)을 복구할 마음을 가지고 이연덕(李延德)에게 최천약과 함께 검토하게 한 것으로 볼 때, 물시계를 복원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악기의 음율이 국가 의례에 중요하기에 최천약은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에서 악기 제작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최천약은 1713년(숙종 39)부터 1753년(영조 29)에 이르기까지 여러 일을 담당하여 영조로부터 1753년(영조 29) 영원히 급료를 하사받았다. 영조는 1755년(영조 31)에 그가 사망하였을 때 ‘애석하다.’라고 할 만큼 슬퍼하였다. 최천약은 영조 대 서평군 이요(西平君李橈)가 ‘그의 재주는 수백 년 이래 다시 구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 정민 이종백(貞敏李宗白)도 ‘범인(凡人)과 다르다.’라고 하거나, 만하 윤유(晩霞尹游)도 ‘눈길을 주어 한번 보기만 하면 곧 터득한다.’라고 할 만큼 여러 인물로부터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이렇게 그는 숙종 대와 영조 대의 최고의 기술자, 즉 국가 명장(名匠)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