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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開化黨)

근대사단체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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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영역닫기영역열기설립배경
개화당이 형성된 계기는 1870년 전후로 김옥균 등이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서, 조선 후기 실학 사상과 오경석(吳慶錫)·박규수·유홍기(劉鴻基) 등의 개화사상과 중국에서 들어온 신서(新書)들을 공부하기 시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오경석은 1853년부터 중국에 파견되는 조선사신단 통역관으로 전후 13차례나 중국 북경에 다녀오면서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보며, 조선의 위기를 절감하고 중국 선각자들이 서양 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環志略』 등의 신서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조선 후기의 실학과 이러한 신서들을 연구하여 스스로 1853년∼1859년경에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친우인 오경석으로부터 개화사상과 신서들을 접한 유홍기도 1860년대 초에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는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1861년 1월 조선 정부가 중국에 파견한 위문사절단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중국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서양 열강의 침략 앞에 피폐해진 중국의 참상을 보고, 그 또한 위기의식을 절감하며, 신서들을 구입해서 돌아와 연구한 결과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경석·유홍기는 장차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을 일으켜야 하는데, 자신들과 같이 중인 출신으로는 정치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혁신 주체 세력은 서울 북촌 양반신분층의 영민한 자제들이어야 하며, 이들 중에서 발탁하여 개화 사상을 교육시켜,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1869년 말 한성판윤 겸 형조판서 박규수와 오경석·유홍기 등은 사상적 동지로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김윤식(金允植)·김옥균·박영효·유길준(兪吉濬)·서광범 등 많은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 사상을 공부하게 하여 정치 집단으로서의 개화파 형성의 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개화 사상을 교육받은 자 중, 김옥균은 22세 때인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어 관리로 나가게 되자 동지들을 모으는 데 진력하였다.
그 결과 개화당은 1874년경부터 김옥균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 사상을 공부한 청년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 등은 동지를 구하면 스승들에게 소개하여 계몽과 교육을 받게 하고 함께 공부하여 개화 사상을 발전시켜 가며 결속을 다져 나갔다. 그런데 개화당의 스승인 박규수가 1877년에, 다시 오경석이 1879년에 죽게 되자, 그 이후로는 유홍기로부터 개화당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김옥균 등은 개화당을 형성, 발전시킴에 있어서 양반 출신들뿐만 아니라 중인·평민·승려·군인 등 신분을 초월한 각계 각층의 인물들을 동지로 규합하였으며, 그들에게 개화 사상을 교육하고 해외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예컨대, 개화당의 주요 인물로 참여한 유혁로(柳赫魯)는 무관 출신으로 오위장이었고, 변수(邊樹)는 중인 출신이었고, 이동인(李東仁)과 탁정식(卓挺植)은 승려 출신이었으며, 이인종(李寅鍾)은 판관, 이희정(李喜貞)은 군인, 이창규(李昌奎)는 보부상의 통령, 윤경순(尹景純)은 동대문 밖에서 매송업(賣松業)을 하던 상인이었다.
또한, 김옥균 등 개화당에 의해 일본 도야마(戶山) 육군 학교로 보내져 서양식 사관교육을 받은 14명의 사관생도 중에는 서재필(徐載弼)과 같이 양반 출신도 있었지만, 신복모(申福模)·이은돌(李殷乭)과 같은 평민 출신도 있었다. 그리고 서양 의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남흥철(南興喆)은 종로에서 금은상을 하던 상인 출신이었다.
물론, 김옥균 등은 양반 출신 청년들을 포섭하는 데 진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개화당은 당시 최고위 벌열출신(閥閱出身)인 이재긍(李載兢)·홍영식(洪英植)·민영익(閔泳翊) 등도 포섭하였는데, 이재긍은 대원군의 셋째형이요 영의정이었던 흥인군 최응(最應)의 아들이었으며, 홍영식은 영의정 순목(淳穆)의 아들이었고, 민영익은 민비의 친조카로 정계의 실력자이었다(민영익은 뒤에 가문의 이익에 집착하여 개화당을 떠나 민비수구파에 가담하였다).
그러므로 개화당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참여한 구성원의 신분은 양반·중인·군인·평민·승려·상인 등 각계 각층의 출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옥균·박영교·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의 최고 지도부는 당시 최고위 양반 출신의 영민한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은 안동 김씨로 부사 병기(炳基)의 양자이며 선택받은 재사로서 정계가 촉망하는 신진 양반 관료였다.
박영교와 박영효는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로서, 특히 박영효는 영혜옹주(永惠翁主)를 취하여 철종의 부마가 되어 정1품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져 있었다. 서광범은 영의정 용보(龍輔)의 증손이며 참판 상익(相翊)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장래를 촉망받고 있었다.
개화당의 최고 지도부가 이와 같이 최고위 양반 출신으로 구성된 것은 일찍이 오경석·유홍기·박규수 등 개화사상의 선각자들이 나라를 구할 혁신세력을 서울 북촌(양반촌)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 중에서 선발하여 개화 세력을 교육하고 급속히 육성 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개화당 형성의 특징의 하나가 된 것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이상과 같이 1874년경부터 형성, 발전했으나,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개항 때에는 아직 어린 청년들이어서 큰 정치적 활동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 등 3개의 항이 개항되어 외국과의 통상 교섭이 본격화되자, 조선왕조 정부는 세계의 정세를 잘 아는 신지식을 가진 개화 관료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당들은 정부 조직에 중견 관료로 진출하여 국왕과 다른 최고위 관료들을 움직여 가면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과 개혁을 위한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개화 정책 중 대표적인 것을 들면 ① 신식 행정관서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0) ②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③ 영선사(領選使)주 01)의 파견(1881) ④ 신식육군(新式陸軍)의 창설(1881).
⑤ 기무처(機務處)의 설치(1882) ⑥ 감생청(減省廳)의 설치(1882) ⑦ 대외 균세정책의 실시(1882) ⑧ 해방책(海防策)의 수립(1882) ⑨ 보빙사(報聘使)의 파견(1883) ⑩ 해관(海關)의 설치(1883) ⑪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의 설립(1883).
⑫ 최초의 영어 학교인 동문학(同門學)의 설립(1883) ⑬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1883) ⑭ 근대 우편 제도의 창설(1883) ⑮ 치도국(治道局)의 설치와 서울 시내의 도로 확장 정리 서울시내의 근대경찰제도의 창설(1883) 복식제도의 개혁(1883) 해외 유학생의 파견(1881∼1884) 농무목축(農務牧畜) 시험장의 설치(1884) 26개 근대상공업 기업체의 설립(1881∼1884) 등과 같은 것이었다.
개화당의 자주적 근대화 정책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그대로 계속 추진될 수 있었으면 당시 낙후한 조선왕조를 개혁하여 세계 대세에 합치된 방향과 방법으로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전환점으로 하여 사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비 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수구파는 청국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청국은 이 기회에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 하기로 결정하였다.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청국 군함에 초청하여 놓고는 청국으로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유폐하였다.
그리고 청국은 민비정권을 다시 수립하였지만, 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한 채, 무력을 배경으로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속방화(朝鮮屬邦化)를 위한 적극간섭정책을 자행하는 등 조선의 자주 독립권을 크게 침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 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 운동을 저지하였다.
그 결과 임오군란 이후의 개화당의 개화 정책은 청군의 탄압과 방해를 받아 가면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개화당 내부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분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개화파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화된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청국의 조선속방화정책과 조선의 자주독립이라는 대립적인 정치적 입장에 의해 개화당이 분화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청국의 조선속방화 적극간섭정책을 조선의 독립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간주하여 이를 격렬하게 규탄했으며, 비록 그들의 정적이지만 청국이 대원군을 납치해 간 것을 조선의 독립을 유린한 것이라며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한편, 김윤식·어윤중(魚允中) 등은 청국의 대원군 납치에 대해 방조적이었으며, 김홍집(金弘集) 등도 이를 강도있게 비판하지 않았다. 이는 자주독립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의 정도에 차이를 드러낸 것이었다.
둘째,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는 폭과 속도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차이점이 노출되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제도의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주장하는 변법적 개화(變法的開化)를 주장했으며, 그것도 최단 기간에 급진적 수행을 추구하였다.
한편,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사회제도의 개혁에는 매우 소극적이어서 아직도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성격이 강했으며, 개화의 속도는 점진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셋째, 자주 근대화의 개화 정책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 장악의 방법에 대하여 개화파 내부에 견해의 차이가 내재하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대경장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권력의 장악에 있어서는 ‘권도(權道)’의 사용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정변(政變)’의 방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시하였다. 한편,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은 아무리 대경장개혁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권도로서의 정변의 방법은 찬성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개화파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분화된 이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만을 ‘개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개화당은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대항하여 ‘독립’을 매우 강조하였기 때문에 ‘개화당’을 당시에 ‘개화독립당’이라 불렸으며, 이에 반하여 청국에 의존하여 집권한 민비수구파를 ‘사대수구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1883년 봄부터 정변을 모색하다가, 1884년 5월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전운이 감돌아 청국이 서울에 주둔한 3000명의 청군 중에서 1500명을 철수하여 안남전선으로 이동시키고, 그 후 1884년 8월 청불전쟁이 발발하여 청군이 연전연패하자 이때가 정변을 일으킬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1884년 9월 단독으로 정변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종래 개화당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보이던 주조선 일본공사가 1884년 10월 30일 귀임한 이후부터 태도를 급전환하여 개화당에 접근하며 호의와 원조의 뜻을 보이자, 개화당은 일본 공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 병력 800명에 일본공사관 일본군 150명을 이용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수구파를 처단하고 신 정부를 수립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혁신정강을 공포함과 동시에 대개혁정치를 시작하려 했으나, 1884년 12월 6일 청군이 불법적으로 궁궐을 침범하여 무력으로 개화당을 무너뜨려 개화당의 갑신정변과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다.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청군에게 피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다시 집권한 민비수구파는 남은 개화당을 철저히 색출, 처벌함으로써 개화당의 대부분은 일단 몰락하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갑신일록(甲申日錄)

  • 개화당연구  (이광린, 일조각, 1973)

  • 『한국사강좌』 Ⅴ-근대편-( 이광린 ,일조각,1981)

  • 개화파와 개화사상연구  (이광린, 일조각, 1989)

  • 「개화사상·개화파·김옥균」 ( 강재언 ,『조선사연구논문집』4,1968)

  • 「김옥균의 개화사상」 ( 신용하 ,『동방학지』 46·47·48합집,1985)

  • 「개화파와 토막파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근대지향성에 관한 비교연구」 ( 박명규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42,1994)

  • 「1880년대초 김옥균과 김윤식의 현실인식」 ( 최진식 ,『한국근현대사논총』,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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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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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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